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가… 진짜 복수에 대해 묻다
학교 졸업 후 20년 만에, 두 여자가 만난다. 잘 차려입고 교양 있는 말투의 여자는 ‘헤더’(김려원·이경미·한지은), 임신해 불룩한 배로 욕설과 줄담배를 입에 달고 있는 여자는 ‘카알라’(권유리·정우연). 카알라는 나이가 두 배 많은 한심한 파트너와 힘겨운 삶을 살았고, 곧 다섯째를 출산할 예정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카알라는 위협적이고, 헤더는 주눅 들어 있다. “이 애 나오면 너 줄까? 대리모 어때?” 카알라의 정신 나간 제안을 헤더는 ‘필요 없다’고 딱 자른다. “대신, 부탁이 있어. 너, 돈 필요하잖아. 내가 줄게.” 헤더가 더 정신 나간 제안을 한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말벌(The Wasp)’은 놀라운 흡인력의 영국 원작 스릴러 연극이다. 잔인한 장면 없이 부딪치는 말의 칼날과 거듭되는 극적 반전만으로 목을 조이는 듯한 긴장감을 빚어낸다.
첫 장면만으로 학교 폭력 복수극이라 추측한다면 오산. 사는 모습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허세와 외도에만 진심인 남자들을 향한 공통의 분노를 확인한다. 그렇다면 두 여자의 통쾌한 복수극? 그것도 아니다. 둘 사이 악연이 한꺼풀씩 까발려질 때마다, 연극은 영국 사회의 뿌리깊은 신분과 빈부 격차, 인간 본성의 선악, 각자가 짊어진 죄와 상처의 무게, 개인이 결과를 감당해야 할 선택의 문제 등을 차례로 파헤치고 질문한다.
죄는 서로 연결돼 있다. 겉보기에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상관없이, 뿌리깊은 가해와 피해의 연쇄는 모진 운명의 밧줄이 돼 두 사람의 인생을 옭아맸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아픔은 몸 한 가운데 깊숙이 박혀 돌덩이처럼 자리잡는다. 그 돌덩이의 무게에 짓이겨지면, 어떤 평범한 희망도 회복 불가능하다. 두 여자의 권력 균형이 뒤집기를 거듭하고, 결말은 평범한 상상력 범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관객은 내내 극도의 몰입과 긴장 상태로 내몰린다.

배우 둘 뿐인 무대 위엔 단 한 순간도 숨을 데가 없다. 소극장의 밀도 높은 공기는 아득한 긴장감으로 꿈틀대며 뒤틀리다 달아오른다. 무심코 던지는 재치 있는 말과 날카로운 비판 하나하나에 인간적 결점이 무심한 듯 세밀하게 드러난다. 노골적이지 않게 이어질 사건들을 암시하는 영리한 복선들도 돋보인다. 헤더와 카알라의 복잡한 과거도 회상이나 재연 장면 없이 오직 대화만을 통해 설명된다. 배우의 몰입이 이끌어내는 공포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두 겹의 반투명 커튼막을 쳐서 세 부분으로 나뉜 무대 위 공간은 뒤로 갈수록 뇌 속 더 깊은 곳에 저장된 기억 혹은 상처를 품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은유적이다. 연극 경험이 없거나 적은 배우들 연기가 실제 삶처럼 자연스러워 놀랍다. 정신 나간 듯 비이성적인 행동들이 섬뜩할 만큼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그 자신 좋은 배우이기도 한 이항나 연출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제목 ‘말벌’은 맹독을 지닌 타란툴라 거미를 끔찍한 방식으로 유린하는 타란툴라 사냥말벌에서 따왔다. 벌은 타란툴라 거미를 자신의 맹독으로 제압해 굴 속으로 끌고 들어가 그 몸에 알을 낳고, 말벌의 애벌레는 살아있는 거미를 파먹으며 자란다.
연극이 끝나도 말벌에 쏘인 듯 마비된 정신을 되돌리는데 한참이 걸린다.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일까. 진짜 복수는 무엇으로 완성되는 걸까. 공연은 다음 달 26일까지, 5만5000~6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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