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문법’으로 전통 재해석… 대한민국 서사 풀어내다 [심층기획-BTS, K팝 새 이정표]
단순 접목 넘어 역사적 의미 되새겨
고유 유산 재발견… 세계 경쟁력 입증
아이돌 팬덤 K역사·문화 탐구 심취
스타들 국보급 유물 해설사로 등장
국립중앙박물관 ‘힙한 성지’ 변모
“한국적인 것, K팝 트렌드 자리 잡아”
경복궁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어도(御道), 이른바 ‘왕의 길’을 따라 방탄소년단(BTS) 일곱 멤버가 걸어 나오는 장면은 세계 190개국 시청자들이 숨죽여 기다린 세기의 장면이 될 터였다. 변방에서 온 K팝 스타가 세계 무대에 우뚝 서 조선의 왕이 걷던 그 길을 당당히 밟는 모습은 K팝이 마침내 역사의 중심에 섰음을 온 세계에 선언하는 일이라는 기대였다.
21일 열린 ‘BTS 더 컴백 라이브 | 아리랑’에서 BTS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대신 드론이 왕의 길을 훑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은 화면을 통해 600여년 전 왕의 시선으로 그 길을 걸었다. 생각보다 단출한 연출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BTS가 왕의 길 대신 광화문 앞에 서는 것을 택한 것은 역사에 대한 존중이었다.

당시 위원회 심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24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BTS는 어떤 장소를 유명하게 만드는 그룹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메타포를 형성하는 그룹이다. 왜 그 길을 걷지 않았는가를 묻게 만드는 것”이라며 “왕처럼 그 길을 걸어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과장하는 게 아닐까라고 판단한 것 같다. 대신 그 장소를 배경으로 하면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K팝이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화려한 장식으로 전통을 덧입히던 단계를 넘어 역사적 맥락과 의미까지 껴안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서구 문법을 표준으로 삼던 세계 대중문화 무대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문화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

K팝과 전통문화의 결합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BTS는 2018년 사물놀이와 탈춤이 가미된 ‘아이돌(IDOL)’로 ‘얼씨구’, ‘지화자 좋다’ 같은 우리말 ‘떼창’을 세계 무대에 울려 퍼지게 했고, 멤버 슈가는 ‘대취타’에서 조선시대 군례악을 힙합 비트와 결합해 전통을 음악 서사의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미 CNN방송은 이번 BTS 컴백을 두고 “젊은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화유산을 재발견하고 취향에 맞게 재정의하는 시기에 이루어진 일종의 문화적 귀환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블랙핑크도 K헤리티지 확산 흐름에 힘을 보탰다. 지난달 새 앨범 출시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과 진행한 대규모 협업에서 관람객은 국보급 유물 해설을 블랙핑크 멤버들의 목소리(한국어·영어·태국어)로 들을 수 있었다. 정적인 유물과 동적인 K팝 스타의 결합이 박물관을 전 세계 팬들이 향유하는 역동적인 성지로 바꿔 놓고 있다는 평가다. 2023년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서 보여준 기와지붕 세트와 한복 의상은 CNN방송이 “한국 유산에 대한 경의”라고 조명할 만큼 한국적 미학의 정점을 찍었다. 제니는 솔로 앨범에서 신라 장신구를 걸치고 화랑의 전신인 원화(源花)로 변신하는 등 K팝 스타들의 전통 재해석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K팝 서사가 헤리티지로 향한다
이처럼 K팝에서 한국적 정서는 더 이상 장식이 아니라 음악과 서사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아이돌의 세계관을 해석하고 공유하는 데 익숙한 팬덤이 이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같은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BTS 팬이 아리랑의 역사를 되짚어보거나, 제니의 무대에서 신라 금관을 발견하고 박물관을 찾는 식이다.
특히 BTS는 이번 컴백에서 ‘아리랑’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 서사에 차용, 앨범 출시를 거대한 문화적 이벤트로 전환시켰다. 1896년 미국 워싱턴 하워드대에서 조선 유학생 7명이 축음기에 남긴 세계 최초의 아리랑 음원에서 모티브를 얻은 애니메이션 트레일러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존된 해당 음반과 BTS의 무대가 겹치면서, 미 포브스는 “130년 세월을 넘어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노래와 선율은 살아남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한국인의 회복력과 정체성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아리랑이 정본 없이 누구나 가사를 더하고 빼며 부르는 열린 구조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듯, BTS가 ‘아리랑’을 택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얹을 수 있는 열린 서사를 K팝의 문법으로 풀어낸 선택이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광화문 공연에 대해 “광화문과 대한민국 홍보에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며 “안전 문제를 잘 챙겨서 사고 없이 잘 됐다”고 호평했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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