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통영국제음악제(TIMF)는 '깊이를 마주하다(Face the Depth)'를 주제로 오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열흘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다. 2002년 첫 개막 이후 매년 세계적인 연주자와 앙상블이 찾아오는 이 축제는, 가을이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로 이어지며 통영을 사계절 음악이 흐르는 도시로 만들어 왔다. 이 축제의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한 사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선생이다. 통영에서 자라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뮌헨 올림픽(1972) 개막 축전 오페라를 단독 위촉받고, 베를린 필하모닉 창단 100주년(1982) 기념곡을 작곡하는 등 세계 음악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고국에서 그의 이름은 오랜 시간 쉽게 입에 오르지 못했다. 냉전 시대 이념의 갈등이 그와 고국 사이를 갈라놓았고,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통영, 그 땅이 빚은 음악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손꼽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이 지금도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동양의 정신과 감성을 서양 악기의 언어로 풀어낸 그의 음악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도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독보적인 울림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통영의 소리와 정서에 닿아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통영은 시인 유치환·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 등 한국 문화·예술계의 거장들을 길러낸 땅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유독 깊고 풍요로운 도시였다. 산청의 외갓집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통영으로 옮겨와 유년 시절을 보낸 윤이상 역시 그 도시가 품어낸 빛나는 예술가의 계보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윤이상과 음악의 인연은 아주 이른 시절부터 시작됐다.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 시절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풍금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어린 그에게, 갯바람과 뱃노래, 통영오광대의 가락이 살아 숨 쉬는 항구 도시의 정서는 음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스며들게 했다. 훗날 그가 서양 악기로 가야금과 해금의 떨림을 재현해낼 수 있었던 것도, 유년 시절 온몸으로 받아들인 그 소리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다시 피어난 결과였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열여덟의 나이에 홀로 일본 유학을 결심할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1935년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한 그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서양 음악 이론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2년 만에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잠시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1939년 다시 도쿄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 열정이 화근이 됐다. 1944년 한글로 쓴 악보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항일의 증거로 낙인찍혀 두 달여 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낸 그는 광복과 함께 통영으로 돌아와 교단에 섰다. 통영 지역 초·중·고등학교 교가 대부분이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절의 발자취다. 훗날 그의 이름이 이념의 그늘에 가려 쉽게 불리지 못하던 시절에도, 그 선율만큼은 학교마다 꿋꿋이 살아남아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음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1955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것은 현대 음악의 본고장에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에 불을 지폈다. 유럽 유학을 결심한 그의 곁에는 남편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묵묵히 헌신한 아내 이수자 여사가 있었다. 이중도 통영국제음악재단 윤이상기념관 담당 팀장은 "아내 이수자 여사는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남편의 음악을 택했다"면서 "그 헌신이 없었다면 세계가 윤이상을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1987년 베를린 음악제에서 '광주여 영원히!' 연주 장면
◇유럽을 놀라게 한 동아시아의 목소리
39세라는 늦은 나이에 떠난 유학이었지만 각오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서양 현대음악의 기초를 다진 그는 이후 독일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만난 스승 보리스 블라허와 요제프 루퍼는 윤이상 안에 잠든 동양적 감수성이 서양 현대음악의 기법과 만날 때 전혀 새로운 음악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북돋워 주었다.
유학 3년 차인 1959년,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선보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가야금과 해금의 음색을 서양 악기로 되살려낸 작품으로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고, 청중은 그를 세 번이나 무대 위로 불러냈다. 1966년에는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예악(禮樂)'을 선보이며 유럽 음악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예악은 예(禮)와 악(樂)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동양의 전통 사상을 서양 관현악의 언어로 웅장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더 이상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라, 유럽 음악계가 주목하는 독자적인 거장으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이어지던 창작 여정은 1967년 '동백림 사건' 앞에서 멈춰 섰다. 중앙정보부는 유럽 체류 유학생을 비롯한 교민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북한과 접촉하고 있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36명을 기소했고, 윤이상도 그 명단에 올랐다. 1963년 6·25 때 홀로 월북한 죽마고우를 만나러 북한을 방문한 것이 간첩 행위로 규정된 것이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최종 확정된 혐의는 반공법 위반, 즉 무허가 북한 방문에 따른 징역 10년이었다. 세계 무대를 누비던 음악가에게 차디찬 감옥의 벽은 깊은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음악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옥중에서 구상하며 창작의 끈을 이어갔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세계적인 음악가 181명이 석방 탄원서에 서명하고 서독·프랑스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면서, 결국 그는 수감된 지 2년 만인 1969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1974년 도쿄에서 열린 윤이상 오케스트라 작품의 밤.
◇이념의 소용돌이, 그리고 뒤늦은 귀향
석방 후 서독으로 돌아갔지만 감시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결국 1971년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 이념의 칼날이 앗아간 것은 국적뿐, 음악만큼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1972년, 오페라 '심청'이 뮌헨 올림픽 문화축전의 개막 오페라로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극장 무대에 오르며 세계 음악계에 화려하게 복귀를 알렸다.
1983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창단 100주년 기념곡을 위촉받아 '교향곡 제1번'을 발표하며, 단순한 이방인 음악가가 아니라 유럽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 쓰는 존재로 인정받았다. 유럽에서만 117편의 작품을 남긴 그는 1995년 독일 방송국이 선정한 20세기 거장 20인에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오페라 심청 공연 장면
그러나 고국에서의 논란은 여전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 북한을 수차례 방문하고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하는 등 북한과의 교류를 이어간 것이 그 중심에 있었다. 북한은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산하에 윤이상관현악단을 운영하는 등 그를 각별히 예우했다.
그의 행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한쪽에서는 분단된 현실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남북의 화해를 이루고자 했던 예술가적 신념의 발로로 평가한다. 반면 실정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인물이 거듭 북한과 교류를 이어간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중도 팀장은 "선생을 아는 이들은 낭만적 민족주의자라고 표현한다"면서 "그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보면 남과 북의 화해자로 살고 싶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평가도 그가 세계 음악사에 남긴 업적을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통영시 윤이상기념전시관과 공원에 있는 베를린하우스는 윤이상 선생의 베를린 자택 모양을 본 딴 조성했다. 건물 1층에는 음악 도서관이 들어와, 선생의 악보 전집, 기타 음악 관련 도서들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고, 2층은 선생의 서재와 응접실이 베 음악을 전공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공간은 성지 순례 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윤이상 기념공원에 있는 생가 터.
1995년 11월 그는 베를린에서 생을 마쳤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2018년 3월, 아흔을 넘긴 아내 이수자 여사가 남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베를린 시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 이뤄낸 귀환으로 마침내 그의 유해가 통영으로 돌아왔다.
사후 재평가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이 정치적 목적으로 과장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유족은 2020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2024년 7월 재심 개시를 최종 확정했다. 그해 10월 첫 공판이 열렸으며, 유족 측은 불법 납치와 고문으로 얼룩진 수사 과정을 들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은 만큼 재판의 결과가 주목된다. 이중도 팀장은 "강제 송환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된 불법 수사로 인한 명예 회복을 받아야 한다. 그게 재심의 가장 큰 의미"라고 밝혔다.
지금 통영은 그를 기억하는 크고 작은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2010년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도천동에 윤이상기념전시관과 공원이 조성됐고, 2013년에는 남해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통영국제음악당이 들어섰다. 매년 봄 통영국제음악제, 가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전 세계 음악인들을 통영으로 불러 모은다.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통영은 이제 그의 음악과 함께 호흡하며, 사시사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의 도시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