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얼어도 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음이라. 백년 세월이 금방이거늘 어찌 배우지 않으며, 일생이 얼마나 길다고 닦지 않고 방일하겠는가?’
원효 스님의 말이다. 출가해서 처음 배우는 책 ‘초발심자경문’에 나온다. 배부르고 등따숩고, 그런 것은 집 떠날 때 놓고 나와야지, 머리 깎았으면 딴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초심을 단단히 조이라는 뜻이되 말인즉슨 얼음장 같다.
열셋에 월정사로 입산했다가 탄허 스님 밑에서 13년을 배우고 스물여섯에 하산한 윤창화(74), 딱 하나 절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저 말씀이라 한다. 돈 300만원 들고 1980년 서울 종로 청진동 낡은 건물 한 귀퉁이 얻어 ‘민족사’를 차릴 때, 다짐한 것이 저 정신이었다.
1년 만에 첫 책을 냈다. 여익구의 ‘불교의 사회사상’. 저자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다. 최후진술에서 “부처님이 이 자리에서 판결하신다면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일 것”이라고 판관에게 일갈했던, 훗날 민중불교 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인물. 때는 전두환 초기, 살벌하던 시절이다. 검열에 걸려 판매 금지 낙인이 찍혔다. 불교책 판금은 이 책이 유일하다.
“표지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삶의 현장에서 부조리한 사태를 도외시하고 인간과 사회를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과 관념이 될 뿐, 당면한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바로 빨간 줄에 불온 도서로 찍혔어요. 첫 책인데 막막했지요. 근데 일주일 지나니까 절에서 주문이 막 들어와요. 분개한 스님들이 움직인 거라. 밤에 김민기를 들으며 울분하던 시절, 판금이라니까 더 잘 팔리는 거요.”
그러나 매번 절에서 책을 사줄 수는 없는 법, 뒤로 몇차례 낸 책이 고만고만했다. ‘민족사’는 불교 학술서 전문 출판사다. 학술서는 집필과 제작에 최소 1년, 길게는 10년도 걸린다. 팔리는 책이라야 고작 500권 안팎, 내는 족족 적자다. 문중이나 종단에서 간혹 기념 발간하지 개인사업자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밑천이 달려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존폐의 갈림길에 섰다.
“그때 내가 해적질을 좀 했어요. 일본 불교책 가져다가 ‘리프린팅’ 해서 파는 거요.”
원작자 허가 없이 무단 복제한 것이 ‘해적판’이다. 중국에서는 ‘산적판’이라 한다. 그는 ‘복제’라 하지 않고 꼭 ‘리프린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문학예술 저작물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에 가입한 것이 1996년이다.
“1980년대 초반엔 해적질이 불법도 아니고, 저작권 개념이 없었어요. 선진국 음반이나 책들을 다 그렇게 해서 팔았지. 불교책은 일본이 최고였거든. 책이 절판되면 값이 서너배 뛰어요. 비싼 책은 수만엔씩 하니까 학자들이 접근을 못 하죠. 국립도서관이나 동국대 가야 기껏 한질이 있는데 먼저 대출해 간 사람이 논문 쓰느라 1년씩 반납을 안 해요.”
그는 해적판을 정가의 2할에 팔았다. 동양철학 불교철학 하는 학자들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행본을 몇권 하다가 이왕 한 김에 한탕 크게 하자 해서 전집 ‘리프린팅’에 나섰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바탕으로 외국의 사본들, 고대 인도어인 팔리어·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두루 아우른 대장경의 완결판이다. 1924년부터 10년간 순차 출간되어 모두 100권이다. 정가 165만엔, 그때 엔화 가치가 서너배 할 때라 한화로 약 700만원이다. 지금 시세로는 ‘0’ 하나 더 붙여야 맞을까, 엄청난 책값이다. 그는 책을 빌려다가 55권을 골라 100질을 ‘리프린팅’ 했다. 원서 1권당 7만원짜리를 1만~2만원 정도에 팔았다.
“꾸준히 나갔지요. ‘대장경’은 10년간 500세트쯤 ‘리프린팅’ 했고, ‘망월불교대사전’ ‘팔리어사전’ 등등, 우리나라 학자들 ‘민족사’ 해적판 안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나 그때 형편이 그랬어요. 국내 판매가 뜸해져서 일본 학자들에게 안내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수대장경’을 비롯하여 일본판 불교책 절판본 등을 2할에 파니까 사시라고.”
말하자면 역수출이다. 며칠 뒤 일본에서 난리가 났다. 요미우리·아사히 신문이 한국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대서특필한 것이다. 외교부에 항의가 들어오고 문제가 커졌다. 당시 문화공보부(문공부)에서 속히 들어오라 한다. 며칠 끌다 들어가니 출판과장이 나라 망신이라고 방방 뜬다. 출판등록 취소하고, 경찰 동원해 해적판 전부 압수하겠다 한다. 그는 차 한잔 달라고 해놓고 찬찬히 얘기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일제가 우리 강토를 짓밟고 국보급 문화재며 36년간 수탈해 간 것이 얼마이며, 전쟁과 징용에 끌려가 죽은 사람은 또 얼마인가?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데 그것 ‘리프린팅’ 해서 우리 학자들 공부하지 않았느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는가?”
이판사판, 백척간두 진일보다. 출판과장, 한대 맞은 듯 멍한 얼굴에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더니 “빨리 처분하고 문제 안 생기게 하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덮었다. 그 일 나고 조금 지나 일본 학자들로부터 해적판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문은 외국으로 퍼져 나가 미국 대만 인도 독일 프랑스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오는, 난데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책은 배로 가고 청구서는 비행기로 간다. 미국 학자들은 책이 도착해야 돈이 오고 일본 대만 학자들은 책 도착 전에 돈이 먼저 온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일본에서 석달 넘게 책값이 안 온다. 이상하다 하는 와중에 교토 오타니대 교수로부터 우편물이 왔다. ‘동료 교수인 내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아내와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서랍에서 귀사가 보낸 청구서가 나왔다. 부인에게 물어보니 안 보낸 것 같다고 해서 내가 대신 부친다’는 짤막한 문구와 함께 전신환 15만엔이 들어 있었다. 이 대목, 무엇이 와 닿는다. 그 선생 학식이 깊다 할 때, 깊은 학식은 저런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는 해적질로 번 돈으로 학술서를 본격 출판했다. 연구 결과물이 출간되는 경우는 유명 학자나 그렇지, 대개 도서관 한쪽에 논문으로 꽂혀 있다 잊히고 마는데 양장본 책으로 나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8년 걸려 출간한 성본 스님 ‘중국 선종의 성립사 연구’, 12년 걸린 석지현 스님 ‘벽암록 역주’(5권), 5년 걸린 일아 스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등 빛나는 역작들이 이때 나왔다.
“책을 내면서 한번도 손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그 생각을 놓은 적이 없어요. 이 책이 낼 만한 가치가 있는가, 오직 그것만 따지지요.”
그러나 디제이(DJ·김대중 전 대통령) 말마따나 ‘상인적 현실감각’이 없는 ‘서생적 문제의식’만으로는 오래 못 간다. 학술서가 ‘서생적’이라고 한다면 대중서는 ‘상인적’이 될 것이다. ‘민족사’는 46년 동안 책 830여종을 출간했다. 그중 학술서가 500여종에 이른다. 어느덧 해적질로 번 돈은 바닥나고, 빚으로 이어갔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강남 집값이 8천만원 하던 때인데 두채 값 빚을 졌다. 1996년 또 한번 존폐의 기로, 그는 모든 책의 반값 할인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듬해, 학술서 고집을 꺾고 처음으로 대중서를 병행 발간하면서 위기를 타개한다.
돈 홍역을 치르고, 40대 중반 ‘고전번역연구원’(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 입학했다. 주경야독하면서 사서오경 3년 과정을 마치고, 7년을 더 유학에 전념했다. 그 무렵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등 저술에 몰두하여 책을 여러권 쓰고, ‘해방 후 역경의 성격과 의의’ 등 논문도 10여편 발표했다.
그는 종로 수송동 작은 공간에 직원 넷을 두고 ‘민족사’를 꾸려가고 있다. 지금은 학술서와 대중서를 절반씩 낸다. 5년 더하면 딱 반세기, 아들이 조계종 스님이라 대를 잇지는 못하고, 그 정도 하고 닫을 거라고 했다.
왜 그렇게 학술서를 고집했냐는 물음에 “팔풍부동(八風不動). 즐거움과 괴로움, 손해와 이익, 욕심과 명예, 사랑과 미움, 인생에 때 없이 부는 그런 여덟가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인데, 나는 많이 흔들렸고 간간이 불을 그리워했다”고 알쏭달쏭 선답(禪答).
동자승으로 입산하여 무예를 익히고 강호에 돌아와 검객들과 일합을 겨루면서 무림을 헤쳐 나가는 와룡생의 무협지 한편을 보는 듯, 열셋에 출가하여 한문을 깨치고 문자의 바다에서 한 생을 일이관지한 그의 삶이 그러하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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