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이어티 5.0’ 처럼…피크코리아 탈출전략, 기업이 제시할 때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서경IN 2026. 3. 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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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피크 코리아 탈출 전략에 관한 AI 이미지.

최근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서늘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단연 ‘피크 코리아’다. 인구 감소, 성장률 둔화, 산업 경쟁 격화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대한민국이 이미 정점을 지나 하강 국면에 들어섰다는 비관론이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쇠퇴는 늘 기술 부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을 국가의 힘으로 바꿔낼 전략이 없을 때, 이해관계 충돌을 조정할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할 때, 무엇보다 미래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무너질 때 위기는 비로소 구조가 된다. 지금 한국에 부족한 것 역시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도약의 질서로 전환할 설계도다.

여기서 다시 살펴봐야 할 점이 있다. 국가적 대전환은 정부 혼자 만들어내는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진국의 산업 전환은 대개 정부의 결단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재계의 선제적 제안과 비시장 전략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방향이 잡혔다. 비시장 전략의 최고 단계는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국가가 어떤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지, 그 미래를 위해 어떤 제도와 질서가 필요한지를 기업이 먼저 제안하는 데 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 즉 경단련의 ‘소사이어티 5.0’은 그 대표적 사례다. 경단련은 ICT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국가경쟁력의 핵심이 단순한 과학기술 개발을 넘어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비전에 있다는 인식 아래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소사이어티 5.0은 단순한 기술 슬로건이 아니었다. 경단련은 이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지속가능한 미래의 개념’으로 제시했고, 이후 ‘상상력 사회’라는 구상으로 확장해 데이터와 디지털 전환, 산업구조 개혁, 인재 재교육, 공공부문 혁신까지 포괄하는 국가 청사진으로 발전시켰다. 중요한 것은 이 구상이 정부가 아니라 재계에서 먼저 나왔고, 경단련이 그 실현 과정까지 주도적으로 끌고 갔다는 점이다. 기업이 국가 비전의 후원자가 아니라 설계자로 올라서는 장면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독일의 산업 디지털 전환 구상은 주요 산업협회들이 토대를 만들고, 2013년 하노버 박람회에서 공식 플랫폼 출범을 알리며 산업의 미래 서사를 선점한 데서 출발했다. 이후 정부가 결합하고 표준화, 생태계, 제조혁신의 제도적 기반이 더해지면서 인더스트리 4.0은 단순한 산업계 구호를 넘어 독일 제조업 혁신의 공용어가 됐다. 국가가 먼저 산업과 미래를 설계한 뒤 기업이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재계가 먼저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가 이를 제도화하는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한국도 일본이나 독일처럼 하나의 강력한 슬로건으로 응축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재계는 분명 국가 성장전략의 공동 설계자로 이동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25년 ‘우리나라 AI 생태계 구축 전략 제언’을 통해 한국이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는 경제 5단체가 ‘미래성장을 위한 국민과 기업의 제안’을 공동 발표했다. 이는 개별 업종의 민원을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재계가 국가 성장모델 자체를 제안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업이 더 이상 사후적 정책 대응에 머물지 않고 제도 설계의 전면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 기업들도 피크 코리아의 암울한 전망 앞에서 이를 돌파할 새로운 국가 비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제조 강국, 의료 강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제조 현장과 의료 현장, 물류와 에너지 시스템에 축적된 방대한 경험을 어떻게 ‘데이터 자산’으로 전환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산업 현장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맥락과 숙련의 감각이 담긴 데이터야말로 한국의 진짜 자산이다.

문제는 이 자산이 아직 국가적 자산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공장과 병원, 물류와 에너지 현장에 흩어진 데이터는 많지만, 이를 국가 경쟁력으로 전환할 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럴 때일수록 선도기업 혹은 산업협회, 경제인 단체가 먼저 나서면 어떨까? 데이터 표준화, 품질관리, 공유와 보호의 원칙, 산업별 전환 우선순위, 노동 재교육과 전환 비용 분담 구조를 담은 ‘국가 AI 로드맵’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제도화하고, 노동계는 전환의 안전장치를 협상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피크 코리아를 넘어서는 길은 결국 이러한 사회적 대타협을 토대로 국가 비전과 전환 전략을 수립할 때 비로소 열릴 것이다.

유럽의 장기 침체를 넘어선 독일, 잃어버린 30년을 지나 다시 성장 서사를 쓰고 있는 일본의 경험을 돌아보자. 성장의 시대를 다시 여는 국가는 정부가 혼자 답을 내놓는 나라가 아니다. 재계가 국가의 미래를 먼저 상상하고, 그 설계도를 공론장에 던질 수 있는 나라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술 낙관론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전략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정책의 언어로, 제도의 구조로, 사회적 대타협의 형식으로 바꿔내는 담대한 비시장 전략이다. 피크 코리아라는 암울한 전망을 깨뜨릴 출발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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