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설거지[퇴근 후, 만나요]

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 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취미란 무엇인가? 나의 친애하는 동료가 그간 ‘취미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해왔다.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는데,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내가 세간에 내세울만한 변변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취미란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겨 취미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 실려있다.
1.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ㅡ 그런 의미에서라면 어쩌면 내게도 요즘 취미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설거지다.
설거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내게 있어 즐거운 활동이다.
첫째, 설거지는 의례로 시작된다 : 본인은 설거지 뿐 아니라 집안일 전반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설거지가 좋은 이유는 설거지-하기에는 항상 조촐한 의례가 선행되기 때문이다.
먼저 쌓인 설거지를 발견하고 나면 기쁨의 한숨을 내쉰 뒤 벽에 걸려있는 마음에 든 파란색 줄무늬 앞치마를 꺼내어 목에 걸치고 허리 뒤로 끈을 단단히 맨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양손에 낀다. 의례라기엔 너무 소박하다고 할 만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이렇게까지 경건하게 그것만을 위한 특수목적의 옷을 껴입고 양손에 특별한 장갑을 끼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마치 과거 한 작가가 책상 앞에 앉기 전 결연히 ‘산문재킷’을 입었듯, 하나의 의식으로서 나는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다. (내게 있어 앞치마두르기가 의례로서의 성격을 지닌 행위인 이유는 사실 옷을 적셔도 별 신경을 안쓰기 때문이다)

둘째, 설거지는 양손을 부자유하게 한다 : 요즘 사람들은 틈만 나면, 집에서도 양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앉아있다. 나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하지만 설거지를 할 때면 물묻은 손으로 기계를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폰을 손에서 놓게 된다. 나의 한가지 습관이라면 이 기회를 이용해, 그날 하루 읽었던 글 중 재밌는 걸 떠올려보거나 혹은 - 싱크대 옆에 놓인 독서대에 시간을 들여 한 페이지를 읽을 만한 종류의 느림보 책을 가져다 둔다. 그러면 쇼츠의 시대에, 책 그 중에서도 유독 안티 ‘페이지-터너’적인 책을 고를 수밖에 없고 대체로 설거지를 하는 내내 그 페이지에 강제로 머물러야 한다. 나는 이런방식으로, 마치 스스로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강제로 영화관에 나를 가둔다고 말한 한 평론가처럼 지루한 책에 잠깐이나마 나를 가둔다. 물론 설거지 동안 내가 잠깐 갇히는 것은 책이 아니라 그냥 사소한 생각주머니인 경우도 많다. 내가 지금 봉투에 담는 음식물 쓰레기를 동물이 먹고 너무 매워서 배탈이 나면 어쩌지, 블랙홀의 구조에 대해서 등...
셋째, 설거지는 (지나치게 쌓아두지 않는 한) 소규모다 : 오렌지를 한개 먹으면 간식이지만 오천개를 먹으면 고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이 고단한 노역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콜센터 직원은 하루에 너무 많은 콜을 받기 때문에 괴롭고, 기자는 하루에 너무 많은 기사를 읽고 또 써야 하기 때문에 괴롭다. 당연히 설거지도 하루에 접시 오천개를 닦아야 한다면 고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1인가구로서 설거지의 양이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대체로 설거지는 내가 즐겁게 감당가능한 만큼만 쌓인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할 때는 제법 흥취와 보람도 생기고, 접시를 붙잡은 손가락 끝에 뽀득뽀득 힘도 들어간다. 가능하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든 일을 내 설거지처럼 한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 이건 쓰면서 생각난 건데 - 바쁘고 마음이 번잡해 정성이 들어간 요리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매일같이 값싸고 우울할 정도로 맛없는 요리를 먹게되더라도 설거지는 언제든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이유로 나는 설거지가 훌륭한 전천후 취미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불광동솜주먹
식세기를 싫어하는 INTJ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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