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에도 '흔들바위' 있다 [경상도의 숨은 명산 김해 무척산]

겨울의 끝자락,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이른 시간에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자마자 맞이해 주는 건 낮은 독경 소리였다. 무척산 어귀를 완만하게 휘감아 도는 그 소리는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이 되어 장엄한 환영사처럼 들렸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소리에 몸을 맡기니 말없이 서 있는 무척산이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척산은 주변의 다른 산과 연결되지 않고 낙동강 하류 평야에 갑자기 우뚝 솟아난 독특한 산세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견줄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쌍산無雙山, 무착산無着山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가락국의 찬란한 전설과 수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영산이다. 2,000년 전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수로왕을 찾아왔던 허황옥 왕비, 철의 왕국 금관가야의 기틀을 다진 그들의 숨결이 이 산의 능선과 계곡, 바위 하나하나에 스며 있다.
'삼쌍연리목'의 신비
생철리 무척산주차장 옆 관광 쉼터 벽면에 '김해의 3대 명산', '수호신 흔들바위', '천지의 전설'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다. 산에 얼마나 거대한 이야기보따리가 잠들어 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멘트 포장길을 잠시 따라 오르면 모은암. 천지 방향 3km, 흔들바위 방향 2.2km 이정표가 나타난다. 산행 후 사찰에 들러 마음을 쉬어가는 게 일반적이므로 흔들바위 코스를 택한다. 2010년에 정비된 등산로는 큰 돌계단과 흙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경사면을 따라 가지런히 쌓인 석축도 눈에 띈다. 나무꾼, 수행자,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옛길의 흔적인지 재단장하며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걸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음미할 게 많은 산이다. 속도를 낮춰 진행한다. 산행시작 0.7km 지점, 약 25분 만에 첫 쉼터인 흔들바위에 도착했다. 생림면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이 바위는 나무꾼들이 쉬어가던 자리이자 수백 년 비바람 속에서도 마을을 지켜온 존재로 여겨진다고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물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흔들바위를 흔들 수 있다는 지점을 찾아 기합을 넣고 힘껏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역시 전설은 전설일 뿐 체면만 구겨 웃고 말았다.

흔들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깊은 숲을 보여 준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기운을 불어넣어 정상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다. 나무 데크에 올라 시원한 조망을 즐기고 드디어 '삼쌍연리목'과 마주했다. 두 그루도 아니고 무려 세 그루가 서로 이어져 한 몸처럼 기대어 자라는 모습은 실로 경이로웠다. 무척산이 품은 연결과 공존의 상징이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란 시 구절처럼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나무를 살펴보았다. 세 군데의 연리 부분을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했고 서로 다른 뿌리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운명을 같이하는 모습에서 부부의 도리를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정상에서 만난 굽은 소나무와 도롱뇽
등산로 곳곳에 드러난 나무뿌리들도 눈길을 끈다. 흙이 씻겨 내려간 자리에 남겨진 뿌리들은 수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에 채여 생채기가 있음에도 굳건히 살아내며 얽히고설켜 기꺼이 계단 역할을 자청한다. 바위 틈새까지도 비집고 들어가 생명의 근원을 움켜쥐고 버티는 소나무들에서 무척산 특유의 신비롭고 강인한 생명력을 본다.
도착한 정상은 탁 트인 풍경을 한 번에 내어주기보다는 사방으로 고르게 풍경 조각들을 풀어 놓는다. 김해 시가지와 너른 들판, 멀리 낙동강까지 겨울 공기 속에서 윤곽만 남긴 채 차분히 펼쳐진다. 그래서 정상이라기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전망대 안내판에는 토곡산, 금오산, 천태산, 용산 등 조망되는 산들의 이름과 유래가 적혀 있다. 금오산은 영남알프스의 전망대, 토곡산은 토하고 곡해야 오를 수 있는 양산 3대 악산이란 설명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600~800m급 산들 가운데 62m로 아주 자그마한 산인 용산이다.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보이는 산인데 이 산은 낙동강을 향해 용이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용산'이라 불린단다. 아무리 봐도 용으로 취급하긴 어렵고 끽해야 도롱뇽처럼 보여 피식 웃음이 나오는 앙증맞은 모습이다.
정상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낸 소나무들은 곧게 뻗지 못한 모습이다. 수십 번 꺾이고 뒤틀리며 자신만의 궤적으로 성장해 결과적으론 산꾼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정상에서 천지못으로 향한다. 등산로가 완만해져 분위기도 부드러워진다. 시간의 흔적만큼 두껍게 쌓인 솔잎과 낙엽이 발걸음을 폭신하게 감싸주었다. 산정 부근에 이토록 너른 호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칼데라 호수가 뇌리를 스쳤다. 규모는 비할 바 아니지만 산 위에 하늘을 담은 연못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곳은 작은 백두산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천지못은 수로왕이 붕어한 뒤 왕릉 조성 과정에서 솟아난 수맥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 정상부에 연못을 두어 보이지 않는 물의 흐름을 다스리자는 발상을 한 가락국 사람들의 상상력과 풍수적 지혜가 놀랍다.

연못 곁의 무척산기도원은 일제강점기 한상동(고신대 설립자) 목사와 동지들이 항거하며 구국 기도를 올리던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도원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곳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받아온 특별한 장소다.
얼음 폭포와 기암괴석의 향연
한적한 통천정에 앉아 천지못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시리게 파란 하늘을 그대로 품은 채 물결마저 얼어붙은 천지못 위로 각자의 시간이 흘러간다. 얼음을 조심스레 밟아보는 사람, 따뜻한 햇살 아래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 말 없이 연못 둘레를 따라 걷는 사람들. 같은 풍경도 누군가에게는 놀이의 공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쉼의 자리,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색의 장소가 된다.
시끌벅적한 단체 산객의 소리에 하산을 재촉한다. "정말 폭포가 얼어 있을까?"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계곡 쪽으로 접어들자 공기의 결이 확연히 달라진다. 숲의 습도와 계곡의 찬 기운이 만나 코끝을 알싸하게 자극했다.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천지폭포. 약 10m 높이에서 떨어지던 물줄기는 겨울 마법에 걸린 듯 엄청난 크기의 얼음기둥과 고드름으로 변해 있었다. 3월까지 이어진다는 얼음 왕국의 입구에서 자연이 빚어낸 조각품들을 감상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하산길에서 또 하나의 연리지 '부부소나무'를 만났다. 두 나무가 하나로 이어진 모습에 부부 인연의 의미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손을 잡고 기도하면 금슬이 깊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차장을 1.1km 앞둔 지점부터 무척산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가을 단풍의 명소인 청송 주왕산의 용추협곡을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 구간이 이어진다. '보는 산'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하는 산'이 펼쳐진다.
높이 15m에 달하는 탕건을 닮은 큰선바위(탕건바위/하늘벽) 옆에 서면 발아래로 시야가 한순간에 열리며 능선과 밀양강, 낙동강이 만나는 삼랑진 일대의 전경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정상이 산을 이해하는 자리라면 큰선바위는 무척산의 근골을 온몸으로 느끼는 자리다. 그래서 무척산의 풍경은 정상에서 한 번, 큰선바위에서 다시 한 번 완성된다.

200m를 더 내려서면 바위 사이가 갈라져 만들어진 통천문을 만난다. 하늘과 땅이 통하는 문이라 하여 붙은 이름처럼 이 문을 지나며 산행의 흐름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바위틈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 한 조각, 차갑고 맑은 공기, 희망 바위와 장군바위, 클라이머들의 땀방울이 서린 암벽들이 마치 병풍처럼 우리를 호위하며 배웅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가락국의 불교 숨결을 간직한 모은암이다. 수로왕과 왕비, 그리고 아들이 각자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2000년이라는 시간을 견뎌낸 사찰의 고요함 속에서 건강과 안녕을 빌어본다.


산행길잡이
무척산은 주차장에서 출발해 원점회귀가 가능한 산행지로 시계, 반시계 어느 방향으로 진행해도 무리가 없다.
전체적으로 길이 잘 정비되어 초급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전반부 흔들바위 구간은 완만하나 하산부에는 기암과 암릉이 이어진다.
흔들바위 코스로 진행할 경우 정상에서 약 500m 하산 지점의 천지못 갈림길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통
부산: 북부산TG ~ 남해고속도로 ~ 동김해IC ~ 삼랑진 방면 국도 ~ 무척산주차장
대구: 중앙고속도로(대구 ~ 부산) ~ 삼랑진IC ~ 생림대로 ~ 무척산주차장
순천: 남해고속도로 ~ 진영분기점 진영휴게소/기장 방향 오른쪽 ~ 광재IC ~ 생림대로 ~ 무척산주차장
맛집(지역번호 055)
이열치열 양푼이 동태찌개(338-2090)는 2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동태찌개 전문점. 지하암반수로 우려낸 국물이 시원하고 깊다. 고니·알을 추가하면 풍미가 한층 살아난다. 친절하고 가성비가 좋으며(1인분 9,000원), 두루치기+ 동태찌개도 인기상품이다.
봉화맷두부(314-9998)는 경북 봉화에서 들여온 콩으로 만든 가마솥 두부요리를 내놓는다. 해물순두부, 된장순두부가 담백하고 구수하다. 넓은 매장과 푸근한 인심 덕에 특히 산객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다.

곰방곰탕(0507-1406-3029)은 진하게 우려낸 국물과 부드러운 고기가 인상적인 곰탕집이다. 곰탕·갈비탕·소머리수육, 육개장까지 다 제 맛을 낼 줄 아는 기본기가 탄탄한 식당. 특히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라 산행 후 편안하게 한 끼 먹기 좋다.
볼거리
김해 시내에 위치한 김수로왕릉을 찾으면 무척산에서 보고 느낀 전설이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오는 체험을 할 수 있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된 김수로왕릉은 1만8,000평의 넓은 대지에 5m 높이의 거대한 봉분으로 솟아 있다. 가락국의 숨결이 여전히 느껴지는 듯하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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