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망루까지 세운 구룡마을 갈등, 주민들의 열악한 삶은…
외부인들 '겁주기'에...임시 이주도 '몰래'
재개발 지연되면서 수해·화재 반복 '불안'
고령 주민 "하루라도 깨끗한 집 살고 싶어"

오전 8시 47분 어슴푸레 사위가 밝아지면서 서울 개포동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로 흰색 제네시스 GV80 차량이 들어섰다. 차는 마을 초입 높이 약 10m 철제 망루 아래에 멈춰 섰고, 갈색 재킷 차림을 한 남성이 모습을 보였다. 꽤나 자연스러운 품새, 초행길은 분명 아닌 듯했다.
남성의 정체는 구룡마을 총통합주민자치위원회(총통합위) 위원장 유모(76)씨. 그가 발 딛는 망루는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와 강남구청 관계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유씨 주도로 만들어졌다. 물론 구청 허가 없이 세워진 불법 구조물이다.
유씨는 지난해부터 불법 망루를 거점으로 총통합위 주민들을 이끌고 있다. 망루 아래 천막에선 일부 주민들이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불침번'을 선다. 천막 안 화이트보드에는 요일별 당직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날 당직인 김모(83)씨는 "유 위원장이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며 "마을이 사라지면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씨는 정작 구룡마을 주민이 아니다. 그가 산다는 구룡마을 2지구 집을 찾아가 보니 출입문에는 '공가(空家) 폐쇄'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입구도 나무판자로 막혀 있었다.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은 마을 외부 어느 곳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을 몰고 마을로, 망루로 '출근'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런 그를 향해 "개발 이득을 챙기려 '주민 행세'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33년째 거주 중인 이모(67)씨는 "입주권 받으려고 마을을 들쑤시고 주민들을 겁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 토지 수용 완료...주민 83%는 이미 임시이주

구룡마을은 1988년 올림픽 전후로 개포동 일대 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 만든 판자촌이다.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게 2012년이었지만 이후 개발은 표류했다. 개발 방식과 기존 거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 방안 등을 두고 의견 차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개발이 가시화된 건 2023년 5월부터다. 그때부터 2년간 서울시는 마을 토지 24만㎡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완료했다. 전체 9개 중 3지구에 공사를 위한 철제 가림막이 설치되기도 했다. 시는 이들 부지에 주거단지(3,379 가구)를 조성하겠다면서 '2027년 착공, 2029년 준공'이란 청사진을 내놓았다.
시는 기존 구룡마을 거주민을 대상으로 '재정착 대책'을 마련했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는 주민들에게 △재개발 기간 동안 인근 임대아파트 이주 △임대아파트 보증금 전액 면제를 제안했다. 재개발이 완료되면 준공 시점에 맞춰 임대아파트에 입주시켜 주겠다고도 했다. 새 아파트 입주권을 줄 순 없지만, 오랜 기간 구룡마을에 거주한 점을 고려해 별도 임대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의 전체 1,107가구 중 916가구(83%)가 제안을 받아들였고, 현재 임대 주택 등에서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나머지 17%, 191가구다. 이들은 아직 임시 이주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고민의 틈을 유씨와 같은 외부인이 파고들었다.
구룡마을 주민들은 '주민 행세'를 하는 외부인들이 주민 간 갈등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재개발 방향이 정해지면서 마을을 떠난 주민들 자리로 외부인들과 그들이 만든 조직이 치고 들어와 '입주권'을 노린 버티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실제 마을 내 분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발 방식을 둘러싼 이들 조직 간 다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총통합위는 과거 지역주택조합 활동 이력 있는 유씨가 이끈다. 한 주민은 "유씨는 과거 지역주택조합 등에서 일하며 재개발 과정을 잘하는 소위 '꾼'으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최근 마을에 자주 등장하는 고모씨 또한 외부인이다. SH 관계자는 "고씨는 구룡마을 주민이 아니다"며 "개발이 진행되자 수양아들이 여기 살았다며 아파트 입주권 받아보려 마을에 등장해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은 총통합위가 외부인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다고 얘기한다.
또 다른 조직인 구룡토지주민협의회는 분양 전환을 요구 중인데, 이는 임대 아파트로 일정 기간 살다가 분양권을 달라는 주장이다. 나머지 한 조직은 '구룡마을통합자치회(통합자치회)'인데, 총통합위·토지협의회와 달리 주민 위주로 구성돼 SH가 제시한 임대 주택 이주와 재정착 방안을 이미 수용했다.
SH는 토지 수용이 완료된 후 지속적으로 개발 협상을 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SH 관계자는 "입주권이나 분양권을 주는 건 불가능하고 임대는 가능하다고 설명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각 조직마다 주민들을 쥐고 흔드는 목소리 큰 극소수 4, 5명이 마을 주민들을 갈라치고 갈등 상황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 SH는 이대로라면 2029년 준공 목표가 2030년으로 밀릴 수 있다고 예상하고, 협상보다는 구룡마을 각 지구별로 철거를 진행하면서 이들 조직을 압박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와 함께 SH는 미이주 주민들을 상대로 부동산을 비우라는 명도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SH 공격하고, 임시이주 주민들에게 "배신자" 힐난

이들 조직과 SH의 갈등은 격해지고 있다. SH의 개발 작업을 방해하는 과정에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달 25일 SH 측이 구룡마을 4지구의 화재 잔해를 정리하던 중, 입주권을 주장하는 조직 관계자가 휴대폰으로 SH 용역 인력의 머리를 가격해 머리에서 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 날엔 또 다른 관계자가 쇠말뚝을 들고 와 SH 직원을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입주권 세력과 임대 세력 사이 대립도 거칠어지고 있다. SH 안을 수용하자는 통합자치회장 이영만(64)씨는 "대화가 안 통하면 총통합위 사무실로 직접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총통합위 소속 주민 노정애(80)씨는 다른 조직들을 향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고 험담했다. 총통합위 천막에서 만난 일부 주민은 기자에게 "어느 쪽 회장을 만나고 왔느냐"며 '소속'부터 확인하는 등 서로 간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평범한 주민들은 눈치만 본다. 임시 이주를 하고 싶어도 "떠나면 마을 뺏긴다"는 '조직들' 때문에 쉽게 선택을 내리지 못한다. 임시 이주한 걸 알게 됐을 때 총통합위 등에서 힐난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임시 이주를 몰래 하기도 한다.
실제 4지구에서 37년을 살았던 A씨는 최근 화재로 집이 불타 어쩔 수 없이 임시 이주를 신청하면서 이를 총통합위 몰래 진행했다. 그는 "임대아파트로 넘어간 걸 들키면 배신자 소리를 듣는다"며 "친척 집에 간다고 둘러대고 나왔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한 한 주민은 "유씨 같은 외부인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숨죽여 지내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90세 허리 굽은 엄마는 아들과 새집에서 살고 싶다

개발이 지연되면서 주거환경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수해와 화재가 반복되며 남은 주민들의 삶은 더욱 불안해졌다. 주민 B(83)씨는 "비가 많이 오면 집 안까지 물이 들어온다"며 "곰팡이 속에서 살다 보니 뇌경색과 고혈압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판잣집 외벽 단열재인 '떡솜'과 연탄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면서 화재도 잦다. 올해 1월 발생한 화재로 4지구와 6지구 대부분 가구가 불에 타 현재는 한 가구만 남아 있다.
이미 마을을 떠난 주민들은 일부 조직의 '버티기'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2년 전 오금역 인근 임대아파트로 이주한 오종래(86)씨는 "임대라도 집을 마련해 주는데 왜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며 "개발만 기다리다 3년이 흘렀다"고 했다. 8년 전 이주한 김모(78)씨도 "버티는 사람들 때문에 구룡마을 밖에서 사는 우리만 손해"라고 했다.
시간을 계산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민도 있다. 올해 90세가 된 김순자씨는 최근 화재로 집을 잃고 임대아파트로 임시 이주했다. 고령으로 허리가 구부러진 김씨는 지금도 매일 구룡마을 개발 상황을 점검하려 강남05번 마을버스를 타고 40년을 살았던 구룡마을을 찾는다.
"집 짓는 걸 기다리다 늙어 죽겠다. 임대아파트라도 아들과 들어와 살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이다." 김씨 말에 힘겨움이 잔뜩 묻어났다.

[반론보도]
[반론보도] <불법 망루로 출근하는 고급 SUV 주인은? 외지인이 갈라놓은 구룡마을> 등 관련
본 매체는 지난 3월 24일 지면 11면(기획) 및 인터넷 사회일반면에 <불법 망루로 출근하는 고급 SUV 주인은? 외지인이 갈라놓은 구룡마을> 등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유 씨는 "본인은 2011년 10월 31일 거주자의 동거인 지위로 구룡마을 2지구에 전입 신고하였으며, 위 거주자는 구룡마을 주민 명단에 속한 자로 현재 SH에서 제공하는 임대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또한 본인은 구룡마을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남병진 기자 south@hankookilbo.com
김준형 기자 junbro@hankookilbo.com
전예현 기자 hyun@hankookilbo.com
나민서 기자 ia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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