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 환자들 곁에 평생 머무셨죠

필자가 여성숙(1918~2026·3·16)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평전 집필에 대한 허락(?)을 받기 위하여 찾아갔던 지난해 3월이었다. 선생님은 필자를 ‘저 양반’이라고 부르며, 취지를 알고는 ‘고맙다’고 말하였다. 곁에 선 언님(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여성 수도자)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소통된 그 만남은 평화롭고 따뜻하였다.
지난달, 필자는 대략 정리한 평전 내용을 5일에 걸쳐 선생님께 읽어드렸다. 마음에 닿는 이름을 들으며, 선생님은 필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지난 16일 오전 11시58분에 마지막 소풍을 떠나셨다. 아직 남아 있는 그 손의 온기는, ‘괜찮다’며 부드러운 미소로 위로하는 듯하다.
여성숙을 기억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지, 만남의 시간은 그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센인들 돌본 신부처럼 살기 위해
1945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진학
인턴 수련 중 폐결핵 환자와 만난 뒤
사회·가족에게 버림받는 이들 위해
‘한산촌’ ‘한삶의 집’ 등 공동체 설립
여성숙의 어린 시절은 배움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 가정 형편상 중단된 공부에 대한 미련은 꿈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 즐겁게 놀다가 깨어보면 꿈이었다. 여성숙은 너무나 허망해서 꿈에서 깬 자신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어린 여성숙은 좌절하기보다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며 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여자아이가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지 무슨 공부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아버지도 공부를 향한 여성숙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식모를 살며 학교에 다녔다. 공부는 남겨진 시간 속에서 겨우겨우 이어졌다. 여성숙은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가 내어주는 도시락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배고픈 자기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던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여성숙은 늘 어려운 사람들에게 친구의 사랑을 전해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았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허기는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소학교 과정을 마무리하자, 마르다 윌슨 신학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학령기를 넘긴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일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가 서툴렀던 여성숙은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주재석 일본 교아이여학교 교장의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은 것은 죄가 된다는 의미에 대하여’라는 시험 문제는, 여성숙이 평생 놓지 않은 삶의 과제였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길’을 여성숙은 스스로 만들어갔다. 한센인의 곁을 지킨 벨기에 신부 다미안(1840~89)과 같은 삶을 살아보리라 생각했던 여성숙은 우여곡절 끝에 1945년 5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8월에 해방이 되면서 방학이 되었다. 고향인 황해도에 갔는데, 38선이 막히자, 어렵게 서울로 돌아와 1950년 5월 의학 공부를 마무리하였다.
여성숙의 공부를 향한 여정은 더디고 힘들었지만, 단단하게 쌓여갔다. 마침내 여성숙이 의사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한 개인의 성공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허기와 눈물, 한숨으로 힘들게 버텨온 시간의 결과였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은 여성숙은 폐결핵 환자와 함께하기로 결심하였다.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죽어가는 폐결핵 환자와의 만남은 한센병 환자와 함께하려던 여성숙의 계획을 바꾸어버렸다. 그렇게 ‘결핵 환자의 어머니, 여성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호칭은 단지 환자 치료에 전념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숙은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의사로서 환자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병을 고치기 위한 치료는 한 사람의 생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리로 이어졌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갈 곳도 없이, 복도에 며칠째 머무는 환자를 보며 더는 미룰 수 없어 만들어진 것이 ‘한산촌’(1965년 설립)과 ‘한삶의 집’(1985년 설립)이었다. 한산촌은 갈 곳 없고, 돈도 없는 환자들이 머물고, 한삶의 집은 어디에도 갈 곳 없는 중증 환자들이 숨을 고를 수 있도록 허용된 공간이었다. 또한, 그곳은 의도치 않게 정치적으로 핍박받던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여성숙은 한산촌과 한삶의 집을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에 기탁하였다.
언론 인터뷰나 수상을 피하던 여성숙이 기꺼운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꿈, 섬에 머물며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를 위한 ‘병원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웬만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던 여성숙도 이 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크게 실망했다.
단순한 치료자 넘어 따뜻한 보호자
위로받은 이들이 장례 상주로 나서
여성숙의 돌봄공동체에서 위로받고 치료받은 수많은 사람 중에 의사로, 화가로, 공무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여성숙의 장례에 기꺼이 상주로 남았다.
여성숙의 삶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의 곁에는 환자들이 머물고 있다. 여성숙은 의사였지만, 단순한 치료자로 머물지 않았다. 때로는 규율을 세우는 관리자였고, 때로는 따뜻한 보호자였다. 여성숙의 삶은 거창한 선언보다는 한 사람 곁에 머무르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 각자의 자리로 조용히 되돌아온다.
박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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