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교수의 필름에세이〉실패한 혁명 후에도 연대는 계속된다
김정숙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위태로운 국제정세 앞에 오늘도 긴장과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러·우 전쟁이 멈출 듯 지속중이고 오래도록 지구상의 갈등지대인 중동은 종교와 민족, 석유와 자원에 대한 이해가 얽혀 오늘도 화약고를 터뜨리고 있다. 대체 전쟁 없는 평화 시대는 언제나 찾아올는지 영화 타이틀처럼 'One Battle after Another'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지난주 있었던 제98회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을 위시하여 6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액션 장르임에도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난 점이 평가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경에 설치돼 있는 불법 이민자 수용시설. 이곳에 불려온 수제폭탄 전문가 게토 팻(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퍼피디아 베버리힐즈(배우 테야나 테일러)의 진두지휘 하에 감금돼 있던 수용자들을 풀어주는 일에 동참한다. 이 과정에서 퍼피디아는 수용소 소장 스티븐 록조(배우 숀 펜)를 성희롱할 만큼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전사급 여성 혁명가다. 이들은 반체제 혁명단체 '프렌치 75'의 일원으로서 사회를 바꿔놓으려는 목적 및 사회악의 응징을 위해 관공서를 폭파하는 등 과격한 테러를 일삼는다.
임신한 배 위에 총을 올려놓고 난사하는 퍼피디아는 이내 아이를 낳고 팻과 행복한 한때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록조가 퍼피디아를 찾아내서다. 이는 프렌치 75에게도 위기라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16세가 된 딸 윌라(배우 체이스 인피니티)와 함께 밥 퍼거슨이란 이름으로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 팻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이번에도 록조다. 록조를 스카웃하여 진두지휘하는 사람들이 배후에 있다. 백인우월주의자들 모임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그들이다. 이른바 백인 남성 파워 엘리트 집단으로 타인종에 대한 투철한 배척을 목적으로 한다.
영화의 원작은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1990; 번역본은 2016, 창비)다. 그의 소설은 방대함, 난해함, 복잡함이 특징인데, 후기작인 이 소설은 그나마 알레고리가 덜한 편이다. 근대의 유산과 폐해로 인해 갈수록 비인간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통해 도리어 그 유의미한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뚜렷하다. 소설의 주역으로 혁명을 위한 예술, 히피적 자유분방함, 마약, 로큰롤로 대변되는 1960년대의 좌파 폭력주의자를 등장시키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1968년 일어난 '68혁명'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사회 부조리(베트남 전쟁, 인종주의, 성차별, 기성 좌익사상…)를 비판하는 반정부 운동이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의 대학생 주도하에 전세계로 파생된 운동이었으나 미국 대선과 프랑스 총선 결과에 따라 실패로 돌아간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인 1980년대에 바라보는 1960년대의 혁명적 진보성은 1980년대에 냉소적으로 쇠락하여 보수성에 함몰되고 만다. 그러나 68혁명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므로 사회적 파장 만큼은 어마어마했다.
좌파적 이상을 노정한 핀천의 1980년대 시선을 앤더슨 감독은 오늘의 시선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영화화가 2020년대이므로 영화 속 과거는 2000년대 또는 2010년대로 바라봐야 하나? 하는 의문도 따르겠지만 실상 이 의문 자체가 영화에서는 무의미하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극우 백인우월 인종주의 대 극좌 폭력적 혁명주의를 대척점에 둔다. 현시점에서 이 대척은 블랙 코미디다. 그렇다고 블랙 코미디마냥 영화는 이분법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한때 프렌치 75의 영웅이었던 팻은 밥이 된 이후로 조직원의 비밀암호마저 잊어버린다. 딸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일촉즉발의 시점에, 이놈의 암호문구를 기억 못하다니… 실패한 혁명이 낳은 무력감은 시간을 잃고 방향성을 잃게 만든다.
감독이 부각시키려는 다른 하나는 여성 혁명가. 퍼피디아로 대변되는 여성 혁명가에게는 내조가 필요하다. 팻은 아이를 맡아 키우고 조용히 은둔한다. 록조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인정을 받으려면 유색인종과의 관계 자체도 문제지만 혼혈아가 있다면 치명적 결격사유다.
록조는 심문에 강간'당함'으로 답한다. 딸 윌라 퍼거슨(본명 샬린 캘훈)은 어릴 적부터 가라테를 배우고 프렌치 75의 암호를 외운다. 자신을 찾으러 온 아빠 팻에게 암호를 요구하는 신은 혁명의 대물림이자 팻의 딸이라는 아이덴터티를 되찾기 위함이다.
부모 세대가 실패한 혁명으로 인해 폭력과 테러를 장착했다 하더라도, 지속되는 실패가 좌절한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가 사랑과 연대, 더 나은 방식의 연대 시위를 끌어간다면 '참여'는 지속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