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따라 걸어야 할 '가천 이길여 길'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지는 인천이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일대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서구의 문물이 물밀듯 들어왔고, 더불어 신식 일자리도 생겼다. 팔미도 등대가 최초로 어둑어둑한 구한말의 바닷길을 밝혔는가 하면, 세관도 처음 문을 열었다.
그 무렵 오늘날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인천분국도 문을 열었다. 새 문명의 소식을 알리는 '인(仁)' 자가 선명한 소인이 찍힌 편지들과 전보로써 전국 곳곳에 개화의 소식이 전해졌고, 그를 통해 각지의 꿈 많고 용기 있는 이들이 대처 인천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성의 대다수가 농사가 유일한 호구지책이었을 당시, 개항장 인천에는 그 외에도 학교, 병원, 철도, 호텔, 부두, 해운사, 무역상, 정미소, 성냥공장 등 신문명에 의한 신식 직업으로서 주목받았고, 그것이 인천이 이주의 도시가 되었던 실마리였다.
1만여 명이 채 안 됐던 개항 초기 인구가 인천을 찾아온 선대(先代)들로 인해 급격히 늘면서 인천은 의도했던, 안 했던 조선팔도의 각지 인물이 함께 모여서 사는 해불양수(海不讓水)적 포용의 사회가 되었고, 일찍이 지역색을 졸업한 선진 도시가 되었다.
그렇듯 인천은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생을 새롭게 개척하고자 하는 이들이 꿈을 펼치는 자아실현의 땅이었다. 저 고구려의 비류 시기가 1차라면, 2차는 개항기, 3차는 6·25전쟁 직후의 세대로 현재 인천 사람은 대부분 그 선구자의 후손이다.
가천 이길여 선생이 고향을 떠나 중구 용동에 병원을 연 것도 1958년, 전쟁 직후였다. 소녀 시절부터 의사가 되기를 열망했던 선생은 지극정성으로 환자를 돌봐 명성이 자자했고, 날로 환자가 늘자 구월동에 대단위 종합병원인 '길병원'을 세웠다.
그 후 오랜 세월 선생이 거둔 사회 공헌은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많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여성'으로서 남긴 자취도 이미 해외 각국의 미디어에서 기록해 왔는데 특히 의료, 교육, 언론, 문화, 봉사 등등에서 늘 눈부신 성과를 이뤘다.
그것은 평소의 신념인 박애, 봉사, 애국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그를 후세가 본받아 걸어야 할 길이라고 필자는 믿어 왔는데, 이번에 시가 오며 가며 선생을 기릴 수 있도록 구월동의 한 도로 이름을 '가천 이길여 길'로 정했다고 한다. 참 잘한 일이다.
선생은 비록 화사한 봄날의 꽃길이 아니라, 좁고, 외롭고, 험한 외길을 평생 걸어오시면서 후세들에게 순수한 인간애 발현이 얼마나 가치 있고 뜻있는 생애 사업인가를 몸소 가르친 이 사회의 큰 스승이었다는 점을 차제에 두루 기억했으면 한다.
세속의 영화를 마다하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오신 선생에게 재삼재사 뜨거운 감동의 갈채를 보낸다. 후세들이 선생이 가꾸어 일꿔 낸 길을 따라 걸으며 시시종종 그 순정한 정신을 이어갈 때 세상은 더 맑고, 더 따듯하고, 더 아름다워지리라 믿는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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