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공자 vs 상남자 ‘팬덤 원조’… 대중가요사 ‘숙명의 라이벌’로 트로트를 ‘불멸의 장르’로[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장재선 전임기자 2026. 3. 2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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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11) 남진 · 나훈아 라이벌 경쟁 <상>
남진, 목포 부잣집 늦둥이… 어릴때부터 팝송·영화 즐겨
팝풍 데뷔곡 실패 뒤 트로트풍 ‘울려고 내가 왔나’ 히트
프레슬리같은 창법·퍼포먼스 인기… 전성기때 해병대 입대도
나훈아, 부산 마도로스 차남… 母 따라간 민요학원서 국악 접해
데뷔곡 표절 시비… 이후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으로 도약
톱스타 반열 올라 피날레 무대 중 피습… 72바늘 꿰매기도
남진(왼쪽)과 나훈아의 베스트 곡을 모아 펴낸 1980년대 앨범 표지 이미지. 자료사진

방탄소년단 등의 K팝 한류는 한국인의 노래 사랑에 바탕하고 있다. 그 사랑에 부응한 스타들이 때마다 나타나 한국 대중가요사를 빛냈다. 그중 외국 팝 장르를 나름대로 소화해 우리 가요로 아우른 가수 남진(80)이 있다. 또 한국 전통 리듬과 정서를 유행가에 접목하며 자신만의 유파를 만든 나훈아(75)도 있다.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뽕짝’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던 트로트를 가요사에 불멸의 장르로 올려놨다. 세계에 K컬처의 근원을 널리 알린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이 속편에서 트로트 음악을 담고 싶다고 한 것은 그 불멸의 힘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남진과 나훈아, 나훈아와 남진. 두 사람은 수십 년간 팬덤을 이끌며 경쟁 구도 속에 각종 논란과 구설에 시달렸다. 그들은 거기에 발목 잡힐 때도 있었으나, 기어이 넘어서며 ‘같은 듯 다른’ 음악 세계를 일궈 냈다.

◇ “가왕보다 어린 가황”

남진(본명 김남진)은 1946년 전남 목포에서,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반도 남쪽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각기 호남과 영남을 대표하며 팬덤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귀공자풍과 상남자상이라는 외모도 차이가 있었다.

나훈아는 한때 1947년생으로 알려졌으나 지인들 증언과 기록을 종합하면 1951년생이 맞다. 본인이 굳이 바로잡지 않았는데, 남진과의 경쟁 구도에서 나이 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듯싶다. ‘가황(歌皇)’이라는 칭호가 있는 나훈아는 ‘가왕(歌王)’ 조용필보다 한 살 아래다. (1950년생인 조용필은 남진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원로 가수들의 전언에 의하면, 나훈아는 선배들에게 예의를 차리되 절대로 ‘형, 누나’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선배가 뭐라고 하면 “우리가 피를 나눴냐”라고 맞받아쳤다. 그랬던 그가 노년에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이라고 부르는 노래를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로 인해 젊은 세대로부터 ‘훈아 형’이라는 애칭을 들었으니.

남진은 서그러운 태도로 선배들을 살갑게 대했고 후배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초대 가수협회장을 하게 된 까닭이다.

알려진 것처럼 남진은 어린 시절을 풍족한 환경에서 보냈다. 국회의원·신문사 사장을 지낸 그의 아버지는 50세에 얻은 아들의 학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가정 교사 3명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공부보다는 닐 세다카, 폴 앵카 등의 팝송을 부르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이때 성악과에 다니던 조영남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됐다.

그는 1965년 우연히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받아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스탠더드 팝풍의 노래 ‘서울 푸레이보이’로 데뷔했는데, 대중의 반응을 전혀 얻지 못했다. 남진 표현대로라면 “처참히 실패했다”.

이듬해 발표한 ‘울려고 내가 왔나’는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트로트풍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불렀던 것인데, 예상 밖으로 크게 히트하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남진은 그때를 돌아보며 “시대가 만들었다”고 했다. 서울에 성공을 꿈꾸며 온 사람들이 고향을 애틋이 그리워하며 ‘울려고 내가 왔나’의 가사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1967년 ‘가슴 아프게’에 이어 발표한 ‘마음이 고와야지’는 트위스트 느낌의 곡이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창법과 무대 액션을 빌려 와 인기를 끌었다. 10대 소녀들은 그를 보면 “오빠”라며 환호했다. 그래서 남진은 지금도 자기가 오빠 부대의 원조라고 자부한다.

나훈아는 무역선을 운항하는 마도로스의 차남이었다. 집안의 유성기를 통해 노래를 접하며 가수를 꿈꿨다고 한다. 어머니가 민요학원에서 노래를 배우며 그를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 접한 국악이 나훈아 음악에 큰 바탕을 이룬다.

서울에 올라와 형과 함께 하숙하며 서라벌고교에 다녔다. 그때 음악학원 원장 소개로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1966년에 데뷔곡 ‘천리길’을 녹음한다. (현재 1969년 녹음본만 남아 있어서 데뷔 연도 이견이 있다.) 이 노래는 표절 시비로 금지곡이 돼 버렸다. 그도 남진처럼 데뷔곡이 망한 것이다.

나훈아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19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히트시켰다. 이어서 ‘임 그리워’ ‘가지 마오’도 인기를 누리면서 톱 가수 반열에 올랐다.

그즈음 나훈아는 레코드사 사장과 함께 부산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났다. 인기 가수가 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친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서울 가서 가수를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중학생 때까지 공부를 잘했던 아들이 의사,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남진이 1960년대 말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의 모습.

◇ ‘가수 꿈’ 父반대 공통점

남진의 아버지도 “하필이면 풍각쟁이냐”라며 가수 활동을 극심하게 반대했다. 그는 어머니가 돈을 대줘 첫 음반을 냈고, 이후로도 도움을 받으며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남진과 나훈아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이었으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또 아들의 꿈을 지원하는 어머니가 없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좇아 산 덕분에 명성을 얻었고, 아버지가 그들에게 원했던 힘과 돈도 거머쥐었다.

남진은 한창 인기를 누리던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했다. 해병대에서 자유롭게 연예계 활동을 해도 된다고 약속해서 입대했는데, 그의 외부 생활이 언론 보도를 통해 논란으로 불거졌다. 그러자 해병대는 그를 베트남전에 보내는 꼼수를 부린다. 이런 사정으로 전쟁터에 보내졌으나, 그는 파병 1년을 마친 후 자진해서 1년 연장 신청을 했다.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 가는 걸 보며 대한 남아로서 차마 귀국할 수 없었다는 게 남진의 후술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베트남전에서의 남진의 활약상이 나온다. 육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베트남에 2년 갔다 오니 후배 나훈아가 톱 가수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다. 그의 신곡 ‘임과 함께’가 전국을 뒤흔들었던 1971년 일이었다. 그 기세로 3년 연속 MBC 가수상을 받았다.

음반업계와 언론은 그와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다. 나훈아는 1972년 2월 시민회관에서 대규모 리사이틀을 열고 1년 전 남진이 세웠던 관객 동원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때부터 양쪽의 팬덤은 과열됐다. 남진 팬들은 나훈아를 “소도둑놈 같다”고 했고, 나훈아 쪽에선 남진에 대해 “돼지 멱따는 소리”라고 했다.

두 사람은 그즈음 영화 쪽에서도 주연으로 맹활약했다. ‘기러기 남매’와 ‘어머니 생전에’엔 함께 출연함으로써 각자 팬들의 열광을 샀다.

나훈아는 1972년 무대에서 피습당해 왼쪽 뺨을 72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자료사진

◇ “싸움 잘했기에 살아남아”

이런 상황에서 1972년 6월 나훈아 피습 사건이 터져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나훈아는 시민회관에서 ‘쇼 스타 페스티벌’ 공연의 피날레에 등장해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무대로 난입한 20대 남성 김모 씨가 깨진 유리병을 휘둘러댔다.

나훈아는 처음에 팬이 인사를 하러 무대로 올라오는 것이라 여겼다. 나중에 심상찮은 상황임을 알고 범인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관객들은 그 시절 흔히 있었던 무대 위 소극(笑劇)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훈아는 어두운 무대에서 혼자서 특수부대 출신의 범인과 7∼8분간 사투를 벌여야 했다. 나훈아는 웬만한 불량배들은 단숨에 때려눕히는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느닷없는 기습으로 인해 왼쪽 뺨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무려 72바늘이나 꿰매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으로 남진은 검찰 조사를 받았다. 범인이 “남진 팬이며 그의 사주를 받았다”고 떠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수사 결과 그의 말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범인은 스토커 성향을 지닌 인물로 사건 전에도 배우 신성일 등을 찾아가 돈을 요구하며 협박했던 일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나훈아 자작극설도 불거졌으나 엉터리 루머였다. 그는 세월이 지난 후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평소 운동을 했기에 그 싸움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스토커의 미치광이 짓으로 판명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과열된 팬덤의 사주, 혹은 자작극이었다면 대중음악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가창의 전설을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편에 계속>

■ 그들은 ‘트로트 가수’ 인가

남진 ‘가요가수’ 호칭 원해
나훈아는 ‘아리랑 소리꾼’

남진과 나훈아는 흔히 트로트 가수로 불린다. 과연 맞을까? 남진이 자신을 ‘가요 가수’, 나훈아가 ‘아리랑 소리꾼’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 대중음악 장르 중 하나인 트로트는 1960년대 후반에 그 이름이 등장했다. 그 이전엔 대중가요, 혹은 유행가라고 했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미국 춤곡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했지만, 박자 빼고는 음악 내용이 다르다. 트로트는 서양 블루스 계통 영향을 받았고 일본 엔카와 가깝다. 엔카는 일제강점기에 민요 등 한국 전통음악을 접목해 발전했고, 그 시절의 우리나라 유행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유행가에서 이름을 바꿔 입은 트로트는 포크, 발라드, 록, R&B 장르 등과 섞이며 다양하게 진화했다.

남진과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얻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대중과 소통했다고 자부한다. 남진은 이렇게 말했다. “내 히트곡 중 상당수가 고고, 디스코, 트위스트 리듬을 갖고 있다.”

그가 로큰롤의 아이콘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후배 가수 정훈희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젊었을 때 남진 오빠와 ‘버닝 러브(Burning Love)’를 함께 부르며 놀았어요. ‘a hunk, a hunk of burning love.’ 오빠가 그걸 익살스럽게 불렀지요. ‘할까 말까 바닐라.’ 그럼 나는 이렇게 응수했어요. ‘줄까 말까 바닐라.’ 하하!”

나훈아의 히트곡 대부분은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곡들이다. 트로트에 우리 고유의 정서와 리듬을 입히려고 애썼다. 대표곡 ‘홍시’에서 보듯 가사에서 우리 전통시가의 음수율을 지키려고 했다. 무대에선 북과 장구를 능숙하게 치며 관객들을 홀렸다.

트로트 특징으로 불리는 ‘꺾기’는 그가 창안한 것이다. 이미자 등 그의 선배 가수들 창법엔 꺾기가 없다. 그가 시도한 이후 나훈아류가 정형으로 굳어진 것이다. 근년에 등장한 임영웅 창법엔 꺾기가 없으니 그에게서 벗어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애절한 단조의 창법을 구사하는 심수봉이 젊은 시절 나훈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무명이었을 때 나훈아가 그 실력을 알아보고 가요계로 이끌어 줬다고 한다. 심수봉은 “내 곡 ‘그때 그 사람’의 실제 주인공이 나훈아 선배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 선후배의 인연이 음악으로 남아 여전히 연심(戀心)의 울림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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