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6살 캐나다인이 옛 인민위 선전부장 아들 구술받는 이유는? [안녕 진화위㉓]

고경태 기자 2026. 3. 2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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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진화위㉓
캐나다 출신 한국 과거사 연구자, 잭 그린버그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잭 그린버그씨가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5년간 과거사 조사기구로 활동해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월26일 제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시작된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는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한국의 1기 진실화해위원회와 집단수용시설의 역사를 학사학위 논문 주제로 다뤘고, 서울 도시재개발로 석사논문을 썼으며,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학살을 연구해 박사과정을 밟으려는 젊은 외국인이 있다.

독립 컨설턴트이자 프리랜서 기자인 캐나다 국적의 잭 그린버그(26)는 가히 ‘걸어다니는 대한민국 과거사 사전’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 분야에 대한 어떤 키워드를 던져도 척척 답이 나온다. 10대 초반에 한국에 진실화해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20대 초반에 이를 주제로 논문을 쓰더니, 이제는 한국에 들어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주검 유기가 있었던 경산 코발트광산과 박사리, 대전 골령골, 영천 아작골, 대구 가창골 등 현장을 누비고 있다. 위령제마다 다니며 유족과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를 비롯해 다양한 인사들을 만났는데, 이옥남 전 상임위원과는 그 인연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관심의 범위는 선감학원, 사북 사건, 해외입양,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중이다.

그린버그씨를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본래는 차 한잔하는 가벼운 자리였는데 뜻밖에도 즉석에서 정식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가 지닌 한국 현대사 및 진실화해위에 대한 몰입의 수준과 지식의 깊이, 연구의 태도는 깜짝 놀랄 만 했다. 케이(K) 팝에 빠진 외국인은 많다. 해외입양 등 국제화된 과거사 이슈에 관심을 가진 외국 언론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인이 한국 과거사에 전방위적으로 깊고 광범위하게 촉수를 뻗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잭 그린버그씨가 2025년 10월 대구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열린 10월 항쟁 위령제에서 헌화하고 있다. 본인 제공

그는 어린 시절 스리랑카 타밀족 등 남아시아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다 ‘이행기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며 진실화해위를 알게 됐다. 그가 몬트리올의 맥길대에서 한국 진실화해위에 관해 쓴 학사논문은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때 과거사 조사기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차이를 평가한 내용이었다. 이후 2021년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의 장학금을 받아 한국에 왔고, 이듬해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들어가 2024년 서울 도시재개발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완성했다. 이즈음엔 동대구역에서 우연히 만난 영천 출신의 채진이(25)씨와 결혼도 했다. 영천은 처갓집이자 10월 항쟁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연구의 현장이 됐다.

본업은 국제 기업들의 한국 관련 프로젝트를 돕는 독립 컨설턴트다. 17살 때부터 글로벌 컨설팅 및 회계 전문가 네트워크인 딜로이트에서 비즈니스 애널리스트로 시작해 컨설턴트로 일한 경력이 있다. 프리랜서 기자로서 코리아프로(엔케이뉴스)·코리아타임스 등에 한국 과거사에 관한 글도 기고한다. 최근에는 2기 진실화해위에서 쟁점이 됐던 백락정 사건(국방경비법 위반 사형판결문이 뒤늦게 발견돼 진실규명이 취소된 사건)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 보냈다. 장기적으로는 독일의 대학에 가서 대구·경북 민간인학살을 중심에 놓고 ‘기억의 정치’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려고 한다. 학살의 현장을 직접 다니는 것도, 매달 옛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희림의 아들 조경호(91)씨를 용인 자택 인근에서 만나 아내의 통역으로 구술채록 작업을 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기억의 정치’는 유년 시절부터 의식 밑바닥에 있었다. 러시아와 몰도바, 영국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유대인 아버지 영향으로 그에게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평생 망각되어선 안될 기억이었다. 그 홀로코스트보다 더 심각하고 규모 면에서 충격적 일들이 한국에서 있었으나, 상당수 한국인은 그 역사가 자신과 관계없는 양 여기고 있어 의아했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아픈 과거사를 세계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유리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비단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기 진실화해위와 관련해서는 다소 냉정한 평가를 했다. “법에 자격이 검증된 이들만 조사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민간인학살을 조사할 때 증언과 증거를 어떤 비중으로 선택할 것인지 규정됐어야 하는데 빠졌다”면서 “유족들의 법 통과 압박에 밀려 급히 처리한 게 아니냐”고 했다. 국내에서 조속한 3기 출범을 위한 피해자와 유족의 요구가 거셌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논쟁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피해자들의 사건 신청이 보상 문제와 첨예하게 얽혀있는 점도 캐나다나 남아시아국가의 과거사 조사기구에 견줘 이례적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5년 10월 영천시가 임고강변 공원에 조성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본인 제공

― 맥길대학교 학부에서 각각 한국의 진실화해위와 집단수용시설을 주제로 두 편의 논문을 썼다고요?

“네. 진실화해위에 관한 논문 ‘국가폭력에 대한 공적 규명’은 1기 진실화해위(2005~2010년)가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차이를 평가하는 내용으로 썼어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진실화해위 활동이 왜 과거를 덮는 식으로 바뀌게 됐는지, 주변 환경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1기 진실화해위 영문 종합보고서를 많이 참고했고요. 당시에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 개별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고 전체적으로만 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논문은 ‘191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사회적 트라우마의 의학적 관리’인데 1910년 이후 한국사회 근대화 과정에서 부랑인들이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보았습니다. 부산 형제복지원이 주요하게 등장합니다.”

― 보수정권으로 바뀌면 진실화해위도 바뀌던가요?

“보수 쪽 위원 숫자가 더 많아지잖아요. 2기(2020~2025년)에서도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김광동·박선영 위원장 체제가 되었듯이, 위원 쿼터가 정치 성향에 따라 바뀌는 게 뚜렷했어요. 과거사 이슈가 정치적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길대 학생 시절인 2019년 3월22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찍은 사진. 맥길대 학생 대표단을 이끌고 제63차 여성지위위원회(CSW63)에 참석했을 때다. 본인 제공

― 한국 과거사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갖게 됐나요.

“제가 맥길대학교 다닐 때 국제개발이 주전공이었고,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부전공이었어요. 남아시아와 관련해선 제가 5살 때부터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의 우표를 수집한 데다 스리랑카 타밀 커뮤니티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타밀족에 대한 엄청난 대량학살이 벌어진 걸 알게 됐어요. 이후 권위주의 체제였던 나라에서 어떻게 정의가 회복되는지, 즉 ‘이행기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곳이 눈에 띄었던 거죠. 맥길대학교에는 한국학 교수님이 없어서 1기 진화위에 관한 논문을 쓸 때는 남아시아학 교수님이, 집단수용시설 관련한 논문을 쓸 때는 중국학과 교수님이 지도해주셨죠.

이후 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에 눈을 돌렸는데, 중국·한국·일본 중에서 중국은 자유롭게 연구하기가 힘든 상황이고 일본은 당시 코로나19로 입국하기 어려웠어요. 2021년 한국에 와 충남대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 공부를 하고, 2022년 고려대에서 국제대학원 석사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오래된 동네에서 진행된 재개발 사업과 고층 아파트 단지 건설이 도시의 이미지 형성과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 한국에서 진실화해위를 통한 과거사 정리는 어떤 특징을 지녔다고 보시나요.

“한국은 시간이 오래 흘렀으나 여전히 발굴되지 못한 사건이 너무 많다고 봅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민주화될 때까지 벌어진 국가폭력이 그때그때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돼 여기까지 온 거죠. 보상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것도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에요. 남아시아나 캐나다에서는 보상 문제 때문에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모티베이션(동기)이 없어요. 한국의 경우는 ‘신청한 사건에 한해 조사한다’는 신청주의 때문에 보상과 연결된다고 느낍니다. 캐나다의 경우 1990년대 후반까지 원주민 아동을 가족으로부터 강제 격리해 백인 문화에 동화시킨 원주민 기숙학교가 문제가 돼 ‘원주민 과거사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했는데 보상 문제는 나오지 않았어요. 이 위원회는 사건이 벌어진 구조적 원인을 다룰 뿐, 개별 사건을 신청받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증인 진술도 어떤 역사적 진실이 있는지 드러내고 공유해 화해하는 데에만 쓰였어요. 물론 후속조치가 없는 건 캐나다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웃음) 캐나다 원주민 과거사위원회가 캐나다 정부에 요구한 원주민 관련 권고 이행 기한은 2081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1950년 7월 초순부터 9월 사이 경북 영천시 임고면 골짜기 등에서 600여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영천지역 국민보도연맹 학살 현장. 그린버그씨가 이번달 찍은 사진이다.

― 한국 진실화해위의 성취와 한계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1기와 2기의 가장 큰 성취는 수만 쪽에 이르는 일차적 기록생산이 아닐까 싶어요. 특히 생존자들이나 참고인들을 인터뷰해서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 국가폭력의 1차 소스(자료)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대에 수많은 연구자들을 위한 보고로 남을 겁니다.

반면 조사관들이 전문적 스킬 교육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게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사관마다 역량에 큰 차이가 있어, 피해자도 어떤 조사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들었어요. 조사관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신청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고요. 조사관이 교육을 받아 기본 역량을 쌓고 검증된 이들만이 조사에 나설 수 있도록 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내용은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을 지낸 이재승(2021. 2~2023. 2,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옥남(2023. 4~2025. 4, 전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두 분도 강조하셨어요. 물론 두 사람은 전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지만요.”

잭 그린버그씨가 결혼한 지 한 달 됐을 때인 2024년 8월 처갓집이 있는 영천시 청통면 텃밭에서 참깨를 수확하는 모습. 본인 제공

― 이재승·이옥남 전 상임위원을 만났군요.

“둘 다 지난해였어요. 이재승 전 상임위원은 현직이 아니었고, 이옥남 전 상임위원은 임기 마치고 사임하기 한 주 남겨놓은 때였어요. 진화위 사무실에서 만나 2시간 넘게 이야기했어요. 조사관 역량 문제에서부터 개별 진실규명을 둘러싼 내부 갈등 등 자신이 경험한 진화위의 모든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셨어요. 이옥남 상임위원의 경우 경산 코발트광산 위령제 등에서 만나 낯이 익었거든요.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셨습니다.”

― 이옥남 상임위원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오프더레코드입니다.(웃음) 다만 제가 이분을 만나고 진화위 상임위원의 자격 요건에 관해 느낀 바를 말씀드릴게요. 진화위 상임위원 자리에 갈 정도면 기본적인 역사 소양교육이 돼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먼저 기록이 없고 구두로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건에서 당사자와 관련자의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또 한편으로는 과거사 진실규명을 하고 화해로 가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난 2월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조세이 탄광의 환기구 ‘피야’ 앞에서. 조세이 탄광에 대한 관심은 경산 코발트 광산의 유산 해석 작업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본인 제공

― 이옥남 전 상임위원은 불명확하고 근거 없는 피해자의 경찰 사찰기록에 근거해 진실규명을 반대한 일로 논란이 됐던 인물입니다. 김광동 위원장 재임 시절 김광동-이옥남 두 사람은 입장이 같았고요.

“김광동 위원장은 2023년 10월 영천 민간인 학살 유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시하에서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해서 언론에 보도됐잖아요. 섬세하게 다뤄야 할 문제를 감정적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해요. 설립취지인 ‘화해’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위 활동에 저해하는 영향을 준 거죠.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이 처했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3기에서는 피해자를 부역자 취급하는 일이 다시는 벌어져서 안되겠죠. 피해자가 희생될 당시 인권의 관점에서 재판을 공정하게 받았는지, 자기변호를 할 충분한 기회를 받았는지가 기준이 돼야 할 겁니다.”

― 3기 진실화해위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아직 위원장을 제외하고 12명의 위원이 임명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어떤 위원들이 그 자리에 갈지에 따라 앞으로 진실화해위 활동이 좌우될 거 같아요. 저는 국회 본회의에서 개정법안(진실화해위 기본법 개정안)이 유족회 압박으로 너무 빨리 통과됐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와 유족들이 빠른 법안 통과를 원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법안의 질을 생각하기보다는 속도와 향후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봅니다. 정말 보완해야 할 부분 중 빠진 게 있어요. 가령 조사방법론이 보완이 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조사한 뒤 증언과 증거 중에 무엇을 우선으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서 법에 명확하게 규정됐어야 해요. 2기 김광동 위원장 체제에서는 증언을 중요하게 안 보고 무조건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잖아요. 이런 부분을 법적으로 보완할 수는 없었을까요? 3기에서는 기존 9명이던 위원 수만 13명으로 늘려 통과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해외입양과 집단수용시설 인권침해 같은 사건을 전담할 조사 3국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진화위 위원 수를 늘리는 것은 조사 과정에서 위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갈등을 대화를 통한 합의로 해결하기 보다는 특정 정치 집단에 힘을 줌으로서 일시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처럼 보입니다.”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잭 그린버그씨가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 대구·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요.

“현재 단계에서는 이 지역의 학살 사건들을 '기억의 정치’와 '사회 운동'의 관점에서 연구할 계획입니다. 사건의 의미가 지역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평가되고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려고요. 이는 4·19 이후 4대 국회가 활동했던 1960~61년 당시와 민주화된 1990년대 후반 이후 유족들의 활동은 물론, 시민 사회의 활동까지 포함합니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고가 없는 이들이 ‘기억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인지도 탐구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10월항쟁의 경우 최근 지역 작가들이나 민주노총 등 노동계에 의해 점차 재조명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과거사를 이렇게 연구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민간인 학살을 세계에 알리는 가교 구실을 하기에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구에서는 한국에 대해 케이팝의 나라, 한강의 기적 등 콘텐츠가 매력적이거나 정부 주도의 눈부신 발전과 성취를 한 나라 정도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면에 국가폭력이 있었고 그에 따라 고통을 겪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이 적지요. 이런 종류의 연구를 수행할 때 외국인으로서 갖는 장점 중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외부인'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내와 함께 과거사 현장들을 다니며 보낸 시간 덕분에 국가폭력 피해자분들과 라포(신뢰 관계)를 형성했지만, 동시에 분석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일종의 중간 지대를 항해하는 셈이죠.

저는 한국인들이 당연하게 여기거나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왜?’라는 '순진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제 연구의 목표는 해외 독자들에게 이 사건이 왜 중요한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다른 국가 사례들과 어떻게 비교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행기 정의의 관점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 매달 옛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희림의 아들 조경호씨를 용인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하신다면서요.

“조경호 선생님은 재작년 영천 민간인학살 위령제를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그분이 1946년 10월 항쟁 당시 영천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그와 가족에게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배우는 것 외에도,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그의 삶의 궤적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깨닫는 점이 많았습니다. 과거 사건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이 곁에 계셔서 좋아요. 제가 연구하는 역사를 훨씬 더 가깝고 생생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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