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전역서 드론 ‘윙윙’ 공포음…어린이 37만명 길거리 떠돌며 생활”

윤연정 기자 2026. 3. 23. 05: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디드리히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
“레바논 시민 100만명 피란, 위기 넘어 비상사태”
지난 18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인근 셸터(대피소)로 쓰이고 있는 한 학교에서 하이디 프랜시스 디드리히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이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미국-이란 전쟁 시작) 2주 반 만에 레바논 시민 100만명 이상이 피란길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위기를 넘어 그야말로 비상사태예요.”

하이디 프랜시스 디드리히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은 지난 20일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최근 레바논에서 발생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국제 인도주의 지원·개발 분야에서 오래 활동한 디드리히 회장은 2024년 9월 중동 지역 긴장이 고조되던 때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으로 부임했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 이후 레바논은 이란 다음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국가가 됐다. 레바논 보건부 등 집계를 보면, 지난 2일부터 19일까지 사망자가 1001명, 부상자가 2584명 발생했고, 집을 떠난 피란민은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레바논과 국경을 맞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근거지로 한 친이란 무장정파 세력인 헤즈볼라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2일 레바논 공습을 시작한 뒤 레바논 남부 전역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며 수도 베이루트 중심부까지 타격 범위를 넓혀 왔다. 이스라엘은 21일(현지시각)에도 대피 경고를 발령하고 레바논을 공습했다.

21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건물들이 파괴됐다. 이스라엘군은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해 이날 새벽 베이루트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특히 이스라엘이 최근 베이루트 중심부를 수차례 공습하며 상황이 악화했다. 디드리히 회장은 “단순한 피란이 아니다. 가족 단위 시민들이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해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디드리히 회장에 따르면, 수십만명의 피란민 아동과 가족들이 베이루트 해안가와 거리에서 텐트를 치거나 차량에서 사는 등 길거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대피소가 630곳 이상 운영되고 있지만 다수의 시민들이 적절한 대피소를 찾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공습이 집중되는 레바논 남부 지역과 베이루트 외곽 지역은 구호단체의 접근이 어려워 구호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 디드리히 회장은 “유엔 구호 차량이 3월 둘째 주부터 남부 레바논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공습 공포는 이제 일상이 됐다. 베이루트 도심 인근에 거주하는 디드리히 회장은 “매일, 특히 한밤중에 이스라엘의 공습이 이어지고 있다”며 “머리 위를 맴도는 드론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레바논 전역에서 끊임없이 들린다. 지속적인 공포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구 밀도가 높은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공습의 영향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미친다”며 “폭발음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지면의 진동이 일상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군이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해 21일 새벽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한 가운데, 한 피란민이 비를 피하기 위해 방수포로 임시 거처를 만들어 들어가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수년째 지속된 경제 위기로 레바논 전체 인구(580만명)의 절반가량인 300만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전쟁으로 인한 추가 피해는 아이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디드리히 회장은 “3월1일 이후 약 37만명의 아동이 피란을 갔다”며 전체 피란민 100만여명 가운데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전쟁 전에도 레바논 아이들 42만명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더욱 악화한 것이다. 레바논은 종파 갈등에 따른 정치 기능 마비와 2020년 발생한 베이루트 항구 폭발, 통화 가치 폭락 등이 겹치며 인구 대다수가 빈곤에 내몰린 상태다.

레바논에 대한 인도주의적 대응은 턱없이 부족하다. 레바논 구호에 필요한 자금 3억830만달러(약 4645억원) 중 실제 확보된 재원은 14%에 그친다. 미국 등 주요 공여국의 원조 축소로 유엔과 구호단체들이 활동을 줄인 탓이다. 레바논 월드비전도 향후 30일 내 최소 12만명에게 물과 담요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기 위해 500만달러(약 75억원)가 필요한 실정이다. 디드리히 회장은 “많은 레바논 시민들에게 지금 생존은, 단 하루를 더 따뜻하게, 안전하게 버티는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인근 셸터(대피소)로 쓰이고 있는 한 학교 마당에서 하이디 프랜시스 디드리히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지난 18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인근 셸터(대피소)로 쓰이고 있는 한 학교에서 한 레바논 피란민에게 하이디 프랜시스 디드리히 레바논 월드비전 회장이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