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양치기 소년의 외침인가[최종수의 기후이야기]
'ESG 공시' 선언만 반복한 정부
시행시기·로드맵 제시 서둘러
신뢰할 수 있는 정책 신호 줘야
[최종수 환경칼럼니스트]이솝 우화 속 양치기 소년은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고 마을 사람들은 그때마다 놀라 달려왔다. 그러나 거듭된 거짓 외침 끝에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최근 우리나라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 추진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이 오래된 우화가 떠오른다. 정부는 수년째 ESG 공시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지만 정작 시행 시기와 방식에서는 일관성을 보이지 못했다. 그 결과 시장에는 기대보다 피로감과 관망이 먼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정부의 초기 방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3년 10월 금융위원회는 주요국 일정과 기업 부담 등을 이유로 도입 시기를 2026년 이후로 미뤘다. 2024년 4월에는 의무화 시기가 확정된 바 없다고 또 한발 물러섰다.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일정을 미루는 메시지가 반복된 셈이다. 출발선이 보이는 듯하다가 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거듭되자 기업들은 긴장보다 관망에 익숙해졌다. 시장의 반응도 점차 무뎌졌다.
한때는 정책 전환에 대한 기대가 다시 살아난 적도 있었다. 2025년 9월 이재명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기후위기 대응과 금융혁신을 주요 전략으로 제시했다. 시장은 이번에는 보다 분명한 일정과 로드맵이 제시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2026년 2월 25일 금융위원회가 공개한 ESG 공시 로드맵 의견수렴안은 이런 기대에 다시 제동을 걸었다. 의무공시는 2028년부터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 코스피 대형 상장사를 대상으로 시작하고 스코프3 공시는 2031년부터 적용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시장이 읽은 신호는 “준비하라”보다 “기다려라”에 가까웠다. 2026년 3월 들어 기후 의무공시 논의가 이어졌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일부 환경단체에 국한되는 모습이다. “늑대가 온다”는 외침이 반복되자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우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정부의 고민에도 일리는 있다. 우리 산업은 제조업 비중이 높고 스코프3 공시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중견 협력업체에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도 단계적 도입을 택했고 미국 역시 관련 논의가 주춤한 상태다. 서둘러 제도를 도입했다가 기업에 과도한 비용과 혼란을 안길 수 있다는 우려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우려하는 것은 규제 그 자체보다 예측 불가능성이다. 일정이 분명하면 그에 맞춰 대비할 수 있지만 시기가 계속 흔들리면 투자와 인력 양성, 내부통제 체계 구축도 미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내 제도의 시행 시기가 늦어진다고 해서 해외시장의 요구까지 늦춰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수출 비중이 높은 우리 기업들은 국내 제도 도입이 지연되더라도 해외시장이 요구하는 ESG 기준에 맞춰야 한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도 5개년 국정과제에서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 중립, 지속 가능한 전환을 핵심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부가 큰 방향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본시장의 핵심 인프라인 ESG 공시 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면 시장은 정책의 일관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제 ESG 공시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언제, 누구부터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다. 시장에 필요한 것은 반복되는 선언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정과 일관된 로드맵이다. 정부가 “곧 시작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면 ESG 공시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정부가 분명한 시행 시기와 단계적 기준을 제시한다면 그 신호는 시장이 믿고 움직일 수 있는 약속이 된다. 우리 정부의 ESG 공시가 더 이상 헛된 외침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정책 신호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최종수 (climat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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