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난로 나누고, 장애인에 자리양보…안전 지켜낸 ‘에티켓 아미’

전남혁 기자 2026. 3. 23.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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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부터 60대까지 하나된 팬들
해외 아미들 “무대앞 직관” 노숙
금속탐지기로 한사람씩 검색도
공연 끝난뒤 자원봉사단 뒷정리

21일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공연이 열린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는 국적과 세대의 경계를 허문 거대한 축제의 무대로 변신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은 유아부터, 처음 만난 해외 팬과 함께 밤을 새운 40대 여성, 휠체어를 탄 60대 부부, 무대가 끝난 뒤에도 남아 쓰레기를 주운 일본인 팬까지. 주최 측 추산 10만4000여 명(행정안전부 추산 6만2000명)이 모인 광장은 각양각색의 이야기로 가득 찼다. 취재팀은 공연 전후 27시간 동안 현장을 지키며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D-24시간(20일 오후 8시)
공연을 24시간 앞둔 광장 일대는 설치 작업이 막바지인 무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일찍부터 몰린 팬들로 북적였다. 딸 이체리 양(4)을 목말 태우고 온 이규한(33) 강초이(26) 씨 부부는 “BTS가 리허설하는 모습은 보지 못해 아쉽지만 벌써 축제 분위기가 나서 흥이 난다”고 말했다. 이경희(60) 박태수 씨(64) 부부도 “아미들과 공연 전날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광화문으로 왔다. 내일 ‘왕의 길’을 걸어 나와 공연할 모습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BTS 공연 전날인 20일 박태수(64) 이경희 씨(60) 부부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정동진 기자
밤 12시가 가까워져 오자 노숙을 준비하는 팬들도 보였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에미나 후세이노바 씨(25)는 “BTS가 좋아 한국으로 유학까지 왔다”며 “공연이 기대돼 추위도 안 느껴진다”고 했다. 이날 에미나 씨와 BTS라는 공통 관심사로 하루 만에 친구가 됐다는 박소연 씨(43)는 그가 무사히 밤을 새우도록 종합비타민과 손난로, BTS 풍선, 굿즈 등을 손에 꼭 쥐여줬다. 인근 24시간 운영 커피숍에는 21일 새벽에도 BTS의 새 앨범을 들으며 몸을 녹이는 팬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싱가포르에서 온 하니사 씨(45)는 오전 3시 “티켓이 없지만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왔다”며 “엄마와 자매가 하늘나라로 떠나 슬퍼하던 시기에 접한 BTS 노래가 나를 위로했다”고 말했다.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후세이노바 에미나 씨(25)와 박소연 씨(43)가 BTS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정동진 기자
동이 트는 오전 6시가 되자 팬들의 설렘이 고조됐다. 이순신 장군상 인근에선 미국에서 온 헤더 사하지안 씨(29), 영국 유학생 무스달리파 아하메드 씨(20), 베트남 유학생 응우옌 투이 둥 씨(20)가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처음 만났지만 현장에서 친구가 됐다고 했다.

응우옌 씨는 옆에 있는 일본인에게 “ARMY?”라고 물으며 서로 가진 굿즈를 보이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50대 일본인 팬 미즈타니 아즈사 씨는 BTS 공연을 보러 일주일 동안 휴가를 내고 친구 사카시타 요시코 씨와 나고야에서 19일 한국에 도착했다. 21일 오전 7시부터 공연장 인근에 도착해 사진을 찍던 아즈사 씨는 “공연 후에는 지민이 다녀와서 유명해진 ‘약수삼계탕’ 등 ‘BTS 성지’를 방문하며 한국 문화를 즐길 것”이라고 말했다.

#D-8시간(21일 낮 12시)
공연장으로 통하는 검문검색대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설치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기 위해 검문소마다 40m가 넘는 긴 줄이 생겼다. 경찰과 서울시 직원들은 비좁은 이동로에서 인파 사고가 나지 않도록 “이동하셔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안내했다. 한 50대 여성이 가스 분사기와 전기 충격기를 소지한 채 입장하려다 차단당해 일순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경찰이 신원을 확인하고 조사한 결과 호신용으로 파악되면서 현장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통제 구역 인근의 일부 행인과 점포 주인이 통행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시민 대다수는 “혹시 모를 인파 사고를 막기 위해선 따라야 하는 조치”라며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21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앞에 설치된 금속탐지 출입구(MD) 옆엔 라이터, 커터 칼 등 회수된 금지 물품들이 쌓여있다. 김다인 기자
한국의 고궁과 아리랑을 콘셉트로 한 공연에 ‘드레스 코드’를 맞춘 팬도 눈에 띄었다. 미얀마에서 온 따진 미인 미옛 우 씨(28)와 이래떠 씨(21)는 BTS 아리랑 콘셉트에 맞춘 빨간색의 한복을 입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유학생인 이들은 “BTS에 빠지고 한국 문화를 사랑하게 돼 이렇게 복장을 갖춰 입었다”고 설명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글로벌 팬들은 ‘K-푸드’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네팔 출신 유학생 라마상기 씨(20)와 카트리 카루나 씨(19), 라이 로사니 씨(19)는 점심으로 불닭볶음면과 김밥을 사서 먹었다. 라마상기 씨는 “네팔에서 처음 먹었는데 맵지 않고 입맛에 맞았다”며 웃었다. 독일에서 온 루이자 씨(25), 차비아 씨(23), 소피아 씨(22)도 “점심과 저녁으로 먹을 김밥도 숙소 근처에서 챙겨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D-30분(오후 7시 반)
공연을 30분 앞둔 행사장 주변에서는 장애인의 관람을 위해 시민들이 길을 터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최희욱(65) 씨와 이기상(69) 씨 부부가 관람석에 들어서자 다른 이들은 선뜻 길을 터줬다.

박제경 씨(69)도 “다른 팬들이 많이 배려를 해줘서 들어오기 수월했다”며 “내 나이에 광화문에서 이렇게 큰 공연을 하는 걸 언제 보겠나 싶어서 직접 전화로 예매했다”고 말했다.

21일 아내 최희욱 씨(64)와 남편 이기상 씨(69)가 안내요원과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BTS 공연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동진 기자
공연의 막이 오르자 국적과 직업의 경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히트곡 ‘다이너마이트’의 전주가 울려 퍼지자 광장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글로벌 팬들은 멜로디에 맞춰 일제히 ‘BTS’를 연호했고, 인파를 통제하는 경찰관들도 흥으로 몸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관람객 10명 중 4명이 40대 이상 중장년층일 정도로 현장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부산에서 온 권모 씨(34) 가족은 할아버지부터 유모차에 탄 손자까지 3대가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권 씨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BTS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다. BTS는 세대와 사돈을 이어주는 가교이기도 하다”고 했다. 손자와 함께 온 이모 씨(64)는 “트로트만 좋아했는데, BTS가 ‘아리랑’이라는 곡으로 공연한다니 궁금해서 와봤다”고 말했다.

21일 서울 중구 원표공원 뒷골목에서 한 시민이 디지털 사이니지 ‘룩스’로 송출되는 BTS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김다인 기자
김길성 씨(69) 부부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현장을 찾아서 신문지 한 장을 바닥에 깔고 하염없이 스크린 앞자리를 지켰다. 김 씨는 “우리나라를 빛낸 사람들을 직접 응원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여행차 한국을 찾은 모이라 하비 씨(64)와 씨에라 맥크나일 씨(70)는 “다리가 아프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은숙(63) 임정용(67) 씨 부부는 반려견 아리(12)·초롱(10)을 ‘개모차’에 태운 채 공연을 즐겼고, 한 60대 남성은 무대가 시작되자 화려한 무대를 배경으로 연신 ‘인증샷’을 남기며 축제를 기록했다. 마지막 앙코르곡 ‘소우주’가 흐르자 중년 남성부터 20대 외국인까지, 일면식 없는 이들이 마치 ‘군무’를 추는 듯 멜로디에 몸을 흔드는 장관이 연출됐다.

서울광장에서 전광판으로 송출되는 BTS 공연을 관람하는 시민들. 김다인 기자
#D+2시간(오후 10시)
모든 무대가 오후 9시경 종료됐지만 축제의 여운은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이어졌다. 많은 팬이 공연장에 남아 뒷정리를 도왔다. 가즈코 사쿠라이 씨(62)는 ‘아미 자원봉사단’ 동료들과 함께 객석 주변을 돌며 쓰레기를 주웠다. 오후 10시 20분까지 남아 청소한 그는 “처음 왔을 때보다 (광장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함께 뒷정리에 참여한 BTS 팬 유모 씨(45)는 “모든 아미의 문화다. 응당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21일 BTS 공연이 끝나고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정리한 카즈코 사쿠라이 씨(62)가 남은 쓰레기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 정동진 기자
21일 BTS 공연이 끝나고 귀가하는 팬이 ‘Keep it clean(깨끗하게)’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김다인 기자
종로구 소속 환경미화원 이재성 씨(47)는 “행사의 규모를 고려하면 쓰레기가 많이 남지 않은 편이었다”고 했다. 미화원의 광장 청소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에 예정보다 이른 오후 10시경 마무리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민 의식이 발전한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정동진 기자 haedoji@donga.com
김다인 기자 daout@donga.com
송진호 기자ji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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