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봄은 동쪽에서 온다 - 정선 시인

드디어 오색 조명 아래 다섯 명의 남자 단원들이 쌍철봉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균형감각과 기술을 뽐낸다. 무표정한 여자 무용수가 공중그물에 몸을 맡기며 유연하게 춤을 추고, 작달막한 단원이 세로 봉을 잡고 옆으로 돌며 공중을 한 바퀴 걷는 것은 한 토막 팬터마임 같다.
열 살 남짓 남자아이가 공중에서 아슬아슬 와이어타기를 한다. 아이는 줄 위에 눕기도 하고 앞뒤로 외발 자전거를 굴린다. 줄 위의 사다리에 올라탄 뒤부터는 자신감이 붙은 듯 줄 타는 속도가 빨라진다. 아이에게는 진땀이 나는 공포의 높이에서 무사히 줄타기를 마치자 안도감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낸다.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생사륜(生死輪)’. 커다란 바퀴가 돌기 시작하면 두 사람이 바퀴 안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바퀴를 돌린다. 그중 한 사람이 바퀴 위로 올라가 곤봉저글링을 하고, 속도가 빨라지자 기회를 엿본 후 바퀴 높이가 최고일 때 줄넘기를 한다. 생과 사의 긴장감, 땀 흘리며 쉬지 않고 바퀴를 굴려야 살 수 있는 단원들의 삶, 곧 우리들의 삶과 닮아 있다.
기대했던 공중그네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남녀 곡예사가 그네와 서로에게 몸을 맡겨 한 쌍의 나비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았던 공중그네는 서커스의 백미였고 스릴이 넘쳤다. 대신 긴 리본에 매달린 남녀 한 쌍이 곡예를 선보인다. 명랑하고 부드러운 음악에 맞춰 리본을 휘감았다가 풀고,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원을 그리며 우아하게 춤을 춘다. 남자가 거꾸로 매달리자 끈으로 이어진 여자가 트리플 악셀처럼 뱅글뱅글 허공을 돈다. 신뢰와 호흡과 두 몸이 하나였던 비행은 공중그네 못지않게 아름답다.
내가 어렸을 적 버스터미널 옆 공터에 서커스가 온다는 벽보를 보면 아이와 어른 모두가 들떴다. 예쁜 여자 머리를 칼로 자르거나 여자가 큰 구렁이로 바뀌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서커스는 신문물이었고 곡예 외에 노래와 춤, 마술, 코미디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었다.
동춘서커스의 동춘(東春)은 창설했던 목포의 사업가 박동수 선생의 호이다. 동춘서커스를 물려받은 박세환 단장의 바람은 남녀노소 3대가 찾는 대중문화이자 문화유산인 서커스 전용극장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 부지 문제로 대부도에서는 2026년 11월 11일까지 공연한다고 한다. 문득 한수산 소설가의 ‘부초(浮草)’ 떠오른다. ‘부초(浮草)’에는 유랑 서커스 단원들의 어려운 생활과 그 속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동춘서커스는 동고동락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코끼리 제니가 죽고 난 후에도 몇 번의 존폐 위기를 겪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서커스의 화려한 공연 뒤에는 고통과 압박과 불안이 숨어 있다. 단원들은 10세 이전부터 5년 이상은 훈련을 해야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몸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서는 몸이 기억할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며 혹독하게 훈련한다. 서커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모자 저글링 단체 묘기에서는 박자가 조금 안 맞고 모자를 떨어뜨렸다. 공중그물의 무용수가 남자의 한쪽 어깨 위로 올라가자 몸집 큰 남자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흉이 아니었다.
사람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예들을 몸으로 직접 해낸다는 것은 경이롭다. 조금은 덜 기발하고, 덜 화려하고, 덜 멋지더라도 첨단기술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사람들은 피땀 흘려 얻은 성과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흥겨워하고 삶의 고통과 슬픔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동춘서커스는 아이와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레미콘처럼 계속 돌려야 생존할 수 있다.”
단장의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몸을 놓아두면 그대로 굳어버리는 사람들. 이들이 안온한 곳에 정착하여 전문예술인으로 환대받고 갈고닦은 자신의 기량들을 마음껏 펼치기를 기원한다.
AI가 인간 이상의 역할을 해도 그리운 것은 언제나 사람의 숨결이다.
동춘(東春), 바야흐로 봄은 동쪽에서 온다. 평일 오후 2시, 주말 오전 11시와 오후 2시, 4시 30분에 단원들에게 봄이 찾아온다. 이 찬란한 봄이 따스한 동녘 바람을 타고 그들에게 줄곧 찾아와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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