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어른이 된 아이들…돌봄의 무게 벗을까?
대학을 갓 졸업한 오동민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편찮은 할머니와 아버지를 돌보고 있습니다.
오동민/가족돌봄청년(27세)
밥 먹고 할머니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공부하고 자고. 시간이 부족하죠. 공부하고 잠깐 쉬잖아요. 그것조차도 죄책감이 들 정도로. 할머니 돌보고 아버지 돌보고 알바든 뭐든 구인·구직을 나가려면 시간이 들잖아요.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며 틈틈이 아르바이트까지 합니다. 한창 미래를 준비할 나이지만 여유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 교통사고로 청력을 잃은 아버지는 조현병과 치매, 알코올 중독까지 겹쳐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치과 검진부터 아버지 상태 확인과 병원 수속까지. 모두 동민 씨 몫입니다.
오동민/가족돌봄청년(27세)
한 번에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일이) 많아져요. ‘지금 아버지 돌볼 시간이네’ 그러면 아버지 (돌보러) 가고. ‘지금 할머니 밥 드셔야 할 때네.’ 그러면 밥 드리는 거고. 뒤를 보거나 앞을 보면 끝도 없어지니까. 그러면 바로 좌절이 되더라고요. 그 상황만 보면서 하는 거예요.

정신적, 신체적 질병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34세 이하의 청소년과 청년을 가족돌봄청년, ‘영 케어러’라고 합니다.
이들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2021년. 홀로 아버지를 돌보던 청년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버지의 사망을 방치한, 이른바 ‘간병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전수 조사를 시작했고, 지난해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대한 법’이 제정됐습니다.
오는 26일,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자신이 그 법의 대상자가 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동민/가족돌봄청년(27세)
‘돌보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그냥 개별적으로 돕는다’ 그 정도로 생각했지. 국가에서 보호를 해주자. 권리를 주자 이런 개념 자체가 없었죠. 도움은 생각을 전혀 못 했었거든요. 저는 그냥 아픈 사람 돌본다. 딱 그 정도 생각이었거든요.
이번 법이 단지 돌봄 청년들을 돕는 센터를 만들거나 지원 신청을 받는 시스템에 그친다면, 정작 이런 청년들은 뒤늦게 포착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성년 이하의 청소년들이 가족을 돌보는 경우는 제때 도움을 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열한 살 소윤이 (가명)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와 삼촌, 그리고 동생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
할아버지는 피부암을 앓은 뒤 심장 수술을 받았고, 할머니에겐 지적장애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뇌경색을 앓은 적이 있고, 삼촌과 남동생은 지적장애에 각각 알코올성 간질환과 ADHD를 앓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소윤이뿐입니다.
3년 전부터 어머니가 같이 살지 않게 되면서 소윤이의 상황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할아버지의 병원 동행을 돕고, 약을 타는 것까지 돕고 있었습니다.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돌봄을 하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이번에 시행되는 법은 도움이 필요한 지원 대상으로 아동과 청년을 모두 명시했습니다. 또 정기적으로 기본 계획을 수립해 실태조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도움이 필요한 대상을 하나의 제도로 묶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동은 보호가 필요한 대상으로, 청년은 돌봄 부담을 덜어야 할 대상으로, 나눠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 이들을 돕는 전담 조직, ‘청년미래센터’를 설치하고, 학업과 취업, 주거를 돕기 위한 사회보장급여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복지부는 일단 청년미래센터 4곳의 신설 예산을 확보했는데, 전국적으로 언제쯤 다 설치될지는 미지숩니다.

법과 제도가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이, 당사자들이 단체를 만들어 서로 돕는 곳도 있습니다.

돌봄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상담의 기초와 복지 제도 등을 배우고, 서로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나눕니다.
이성준/(20세) 중학생 때부터 말기암 어머니와 동생 돌봄
“네 잘못이 아니야”를 가장 먼저. 돌봄을 하다 보면 죄책감이 조금 들 때가 있었어요. 내가 열심히 돌보는데도 호전이 되지 않거나 ”너도 (누군가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야“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오현아/(34세) 유년기부터 정신적 어려움 있는 어머니와 동생 돌봄
우리 집만 이런 것 같고, 나만 이런 것 같고 한데. 사실 크면서 정말 많은 어려움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냥 존재 자체로 그냥 환영받는 느낌이 먼저 들면 너무 좋겠다.
여기서 교육을 받은 돌봄 청년들도 다른 돌봄 청소년들을 돌봐줄 수 있는 상담자가 되어, 어려움을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단체를 만든 조기현 씨도 15년째 아픈 아버지를 홀로 돌보고 있습니다.
이 단체를 이끌며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조기현/(34세) 폐암·알코올 의존증 아버지 돌봄
돌봄을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면 좋겠다. 그래서 결국에는 돌봄을 하는 순간 삶이 다 무너질 정도로 돌봄하는 게 아니라 내 삶도 살면서 아픈 누군가의 곁에 그냥 머물기도 하면서 이렇게 돌봄해도 괜찮은 사회였으면.
제도의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에게 새로 시행될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강하라/(32세) 유년기부터 지적장애 아버지 돌봄
명칭이 없었다가 생긴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고요. 이제는 정말 영 케어러, 가족돌봄청년, 아동 등의 명칭이 생겨서 다행이고. 늘 복지 커트라인 안에 벗어난 그 외의, 논외의 삶이었으니까.
이성준/(20세) 중학생 때부터 말기암 어머니와 동생 돌봄
어떤 정책이 됐든 항상 그런 생각은 드는 것 같아요. 시민들한테 정책이라는 건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있어도 있는지 모르면 결국에는 사용할 수 없게 돼요. 그런데 (청년종합지원센터가) 정말 많이 확장됐으면 좋겠어요.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여겨온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돌봄 문제를 연구해 온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 씨는 돌봄을 사회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에노 치즈코/ 사회학자 · ‘돌봄의 사회학’ 저자
(영 케어러들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곧 ‘돌봄’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돌봄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매우 낮게 평가해 온 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의 부담을 나눠야 합니다. ‘돌봄의 사회화’라는 것은 모두가 (의무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몸져누워도 다른 가족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회.
당신의 아픔을 개인의 탓이라고 하는 대신 사회가 나눠야 할 몫이라고 여기는 세상.
김희강/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돌봄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탱하고, 공동체 전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그런 내적인 토양이라는 생각이 들죠. 돌봄은 취약한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태도와 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이유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기제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돌봄으로써 당당할 수 있고 나의 책임과 권리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족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들.
이들은 돌봄이 고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기억되는 삶, 그런 미래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동민/가족돌봄청년(27세)
27년 동안 가족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어요. 아파도 좋으니까 같이 모여서 가족사진을 한번 찍고 싶기는 해요. 남자들끼리 군대 얘기 많이 하잖아요. 서로 ‘누가 많이 힘들었나’ 대결해요.(돌봄도) 서로 추억이 될 수 있게. 누군가에게는 이제 가볍게 말하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서로 잘 돌봤구나. 그렇게 잘 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영 케어러 #돌봄 청년 #돌봄 아동 #청년 지원 #위기아동청년지원법 #우에노 치즈코 #청년미래센터 #돌봄수당 #간병
촬영:조선기 김성미 강우용 설태훈
편집:최민경
그래픽:장수현
리서처:홍민지
조연출:엄희주 박재범
섭외·구성: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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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혜 기자 (grace35@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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