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작골을 아십니까?…한국 민간인 학살 세계에 알릴 것”

“영천 아작골에서 얼마 전 지갑을 흘렸어요.”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잭 그린버그(26)가 명함 대신, 볼펜으로 연락처를 적은 작은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총소리가 골짜기를 울리며 사람들이 ‘아작이 났다’고 해서 ‘아작골’이라는 지명이 붙은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학살 현장인 임고면 일대에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거였다.
캐나다 국적의 그는 1년의 절반을 서울에서, 나머지 절반은 영천에서 보낸다. 영천은 2년 전 동대구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성 채진이(25)씨와 결혼하면서 그의 처갓집이 된 곳이자 10월 항쟁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연구의 현장이 되었다. 10월 항쟁은 1946년 미군정 탄압에 맞선 대구·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봉기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직후 관변 단체에 가입한 이들을 군경이 집단적으로 총살한 사건이다.
그는 가히 ‘걸어 다니는 대한민국 과거사 사전’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 분야에 대한 어떤 질문을 던져도 척척 답이 나온다. 고향인 토론토에 살던 10대 초반에 한국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20대 초반 몬트리올의 맥길대에서 이를 주제로 학사 논문을 쓰더니, 이제는 한국에 들어와 아작골은 물론 경산 코발트광산과 박사리, 대전 골령골 등을 누비고 있다. 관심의 범위는 선감학원·사북 사건, 해외입양,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중이다.

케이(K)팝에 빠진 외국인은 많다. 해외입양 등 국제화된 과거사 이슈에 관심을 가진 외국 언론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인이 한국 과거사에 전방위적으로 깊게 촉수를 뻗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그의 본업은 국제 기업들의 한국 관련 프로젝트를 돕는 독립 컨설턴트다. 프리랜서 기자로서 코리아프로(엔케이뉴스), 코리아타임스 등에 한국 과거사에 관한 글도 기고한다. 최근에는 2기 진실화해위에서 쟁점이 됐던 ‘백락정 사건’(국방경비법 위반 사형판결문이 뒤늦게 발견돼 진실규명이 취소된 사건)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 보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구·경북 민간인학살을 중심에 놓고 ‘기억의 정치’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려고 한다. 박사과정은 독일의 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의 학살 사건들을 ‘기억의 정치’와 ‘사회 운동’의 관점에서 연구할 계획입니다. 사건의 의미가 지역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평가되고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해요. 제 연구의 목표는 해외 독자들에게 이 사건이 왜 중요한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다른 국가 사례들과 어떻게 비교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행기 정의 관점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억의 정치’는 유년 시절부터 의식 밑바닥에 있었다. 러시아와 몰도바, 영국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유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평생 망각되어선 안 될 기억이었다. 그 홀로코스트보다 더 심각하고 규모 면에서 더 충격적인 일들이 한국에서 있었으나, 상당수 한국인은 그 역사가 자신과 관계없는 양 여기고 있어 의아했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아픈 과거사를 세계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유리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비단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만났다는 과거사 분야의 인사들은 끝이 없었다. 그중에는 유족 대표와 진보적 성향의 연구자가 많았지만, 유족들과 각을 세우고 대립했던 이옥남 진실화해위 전 상임위원도 있었다. 대구·경북 지역 위령제에서 여러차례 만난 인연으로 인터뷰를 청해 두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내용은 ‘오프더레코드’란다. 옛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조희림의 아들 조경호(91)씨도 위령제에서 맺은 인연이다. 조씨와는 한달에 한번 경기 용인 자택 인근에서 만나 아내의 통역으로 구술 채록 작업을 하고 있다. 1946년 당시 영천에서 직접 목격했던 10월 항쟁으로 시작해 이 사건이 본인과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삶의 궤적을 좇으며 큰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과거사 진실규명의 허브가 된 진실화해위는, 어린 시절 스리랑카 타밀족 등 남아시아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다 ‘이행기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며 알게 됐다. 그가 맥길대에서 한국 진실화해위에 관해 쓴 학사 논문은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때 과거사 조사기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차이를 평가한 내용이었다. 이후 2021년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의 장학금을 받아 한국에 왔고, 이듬해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들어가 2024년 서울 도시재개발을 주제로 한 석사 논문을 완성했다.
3기 진실화해위와 관련해서는 다소 냉정한 평가를 했다. “피해자와 유족의 압박에 따라 너무 급히 법안(진실화해위 기본법 개정안)을 처리한 게 아니냐”는 거였다. “능력과 자격이 검증된 조사관들만 조사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민간인 학살 조사 때 증언과 증거를 어떤 비중으로 선택할 것인지가 법에 규정됐어야 하는데 빠졌다”고 했다. 조사3국 설치 등의 취지는 알지만, 위원 수를 9명에서 13명으로 늘린 것도 합의보다는 정치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국내에서 조속한 3기 출범을 위한 피해자와 유족의 요구가 거셌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논쟁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건 신청이 보상 문제와 첨예하게 얽혀 있는 점도 캐나다나 남아시아의 과거사 위원회와 견줘 이례적이라고 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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