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쓰고 핸들 잡은 어르신 한 박자 늦은 반응에 ‘진땀’
점멸 신호 무시·브레이크 지연
반응 늦고 위험 습관 드러나
고령 운전자 안전 점검 필요

“아버님, 적색 점멸등에서는 정차했다가 주변 살핀 후에 출발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하시면 사고 납니다.”
지난 20일 광주시 북구 한국도로교통공단 광주·전남지부 2층 강의실. 올해 처음으로 광주·전남지부에 설치된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A(77)씨는 어린이 통학버스 정차 상황과 점멸 신호 구간에서 정지하지 않고 주행하다 ‘사고 위험’ 경고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으며 출발한 가상 화면 속 도로에서 신호 대기와 차선 변경, 좌·우회전 상황에 맞춰 가상 운전을 하던 A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A씨는 주행 내내 방향지시등을 꼬박꼬박 켜고 좌우를 확인하는 등 신중한 운전 습관을 보였다. 그러나 어린이 통학버스가 정차한 상황과 점멸 신호 구간에서는 그대로 주행을 이어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를 치는 사고 상황이 발생했다.
제한속도 구간에서도 속도를 충분히 올리지 못하거나, 정지선보다 한참 앞에서 멈춰 서기도 했다.
가상 주행 중 “300m 앞 좌회전입니다. 차로를 변경하십시오”라는 안내 음성이 반복됐지만, A씨는 이를 제때 따라가지 못하거나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행을 마친 A씨는 “예전에는 경찰서에서 그냥 갱신했는데, 만 75세가 넘으니 치매검사도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예약했다”며 “처음엔 생소했지만 해보길 참 잘했다. 이런 걸 자주 하면 감이 빨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공단에서는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 2명을 대상으로 한 ‘VR 운전능력 진단시스템’ 광주·전남권 첫 시범 교육이 진행됐다.
면허 갱신을 앞둔 고령 운전자가 VR 기기를 착용하고 가상 도로를 직접 주행하는 체험형 교육이다.
해당 VR 기기는 최근 광주·전남을 비롯해 전국에서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가 잇따른 데 따라 올해 처음 도입됐다. 고령 운전자는 면허 갱신 시 치매검사와 교통안전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이때 기존 이론교육과 컴퓨터 자가진단에 더해 VR 기반 체험형 진단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광주·전남 지역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도 증가세다.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에 따르면 광주지역 노인운전자 교통사고는 2020년 1000건, 2021년 1032건, 2022년 1089건, 2023년 1303건, 2024년 1432건으로 꾸준히 증가했고, 전남 역시 같은 기간 1950건에서 2197건으로 늘었다.
교육을 담당한 신기주 한국도로교통공단 광주·전남지부 안전교육부장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가진단을 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주행해 보면 본인도 몰랐던 위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다”며 “특히 어린이 통학버스 정차, 비보호 좌회전, 보호구역 감속 같은 부분은 고령 운전자들이 반드시 다시 점검해야 할 요소”라고 설명했다.
특히 고령 운전자는 시력과 청력 저하, 근력 감소 등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데다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과정에서도 반응 속도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신 부장 설명이다.
이날 체험 과정에서도 이 같은 모습이 확인됐다.
A씨에 이어 운전대를 잡은 B(76)씨도 긴장된 표정으로 VR 기기를 착용했다. 좌석 위치를 맞추고 핸들을 잡은 뒤 말없이 화면에 집중한 채 주행을 이어가는 내내 박씨에게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반에는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번갈아 더듬으며 조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로 중앙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제한속도 50㎞ 구간에서 최고 57㎞까지 속도를 올리는 등 속도 위반이 여러 차례 기록됐고, 교차로 진입 시에는 가속할 지, 제동할 지 망설이며 판단이 늦어지는 모습도 나타났다.
B씨는 체험을 마친 뒤 “아무래도 내 차가 아니라서 익숙하지 않고 실제 운전과는 좀 다르다”면서도 “그래도 내가 뭘 놓치고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VR 운전능력 진단시스템은 비보호 좌회전, 어린이보호구역, 점멸 신호, 차선 변경 등 다양한 도로 상황을 3개 시나리오로 구성해 운전자의 반응을 분석한다. 속도 위반, 신호 위반, 차로 유지 여부, 반응 시간 등이 수치로 기록돼 결과표로 제공된다.
신 부장은 “고령 운전자에게 무조건 면허 반납을 요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스스로 운전 능력을 점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이 시스템은 처벌이 아니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진단 도구”라고 강조했다.
이어 “대중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는 차량이 생계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운전을 계속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청과 한국도로교통공단은 이번 시범 운영을 통해 시스템의 수용성과 신뢰도를 검증한 뒤, 고위험 운전자 적성검사와 조건부 면허 제도에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전남에서는 광양운전면허시험장에도 해당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글·사진=서민경 기자 minky@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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