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1년, 이재민 삶은 여전히 '그날'에 멈췄다

이희대 2026. 3. 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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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주택에 갇힌 일상…"우리는 아직 그날에 산다"
멈춰 선 문화재 복구…타버린 시간 위에 선 폐허
엇갈린 복구 속도…경제는 '재기', 삶은 '정체'
지난해 산불로 대부분 무너진 청송 달기약수터 상가들. 19일 오전 이제 곳곳에 땅을 다지고 새롭게 건물을 지으려고 한창 굴삭기 등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종훈 기자

지난해 경북 북부지역을 집어삼킨 '괴물 산불'이 지나간 지 1년. 피해현장은 여전히 '복구'라는 단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듯 멈춰 서 있었다. 공장 굴뚝에서는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고 일부 시설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그날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19일 오전 안동시 길안면 현하리 한 이재민 임시컨테이너 주택단지에서 만난 구순의 박 모 할머니. 손병현 기자

◆임시주택에 갇힌 일상…"우리는 아직 그날에 산다"

"불은 꺼졌는데, 우리는 아직 그날에 살고 있니더."

지난 19일 안동시 길안면 현하리의 한 임시주택 단지. 7평 남짓한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박모(90) 할머니는 산불 이후의 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집을 잃은 뒤 받은 보상금은 아들의 수술비로 대부분 사용됐고, 새 집을 지을 여력은 남지 않았다. "집 지을 엄두가 안 난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안동시에 따르면 현재까지도 이재민 임시조립주택 800여 동이 사용 중이다. 당초 공급된 982동 가운데 일부는 떠났지만, 여전히 수백가구가 '임시'라는 이름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옆 컨테이너에 사는 장모(67) 씨 부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불에 타버린 사과 과수원을 다시 일구기 위해 묘목 100주를 심었지만 수확까지는 최소 5년, 당장 생계가 막막하다. 이들은 "평당 건축비가 500만~600만원인데 보상금으로는 집 한 채 짓기도 어렵다"며 "1억원을 받아도 빚과 생활비로 금세 사라진다"고 했다.

청송과 영덕 지역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송읍 임시주택 단지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시골 풍경이다. 장독대와 말린 농산물, 이웃과의 담소까지 일상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임시'라는 시간은 이미 1년을 넘겼다.

주민들은 전기요금 지원 기준인 40만원에 맞춰 생활을 조절하며 버티고 있다. 일부는 40만~70만원대 고지서를 받으며 '전기요금 노이로제'를 호소한다.

영덕 석리 따개비마을의 이명순(67) 씨는 "방 한 칸짜리 집이 답답해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산불 이후 우울감이 계속된다"고 털어놨다.

이재민들에게 주어진 임시주택 거주 기간은 2년. 하지만 현실은 그 이후를 기약하기 어렵다.

한 주민은 "공장은 돌아가도 사람은 돌아가지 못했다"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운사 범종이 깨어진 채 대웅전 앞 마당을 지키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이희대 기자

◆멈춰 선 문화재 복구…타버린 시간 위에 선 폐허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고운사. 한때 법음이 울려 퍼지던 대웅전 앞마당에는 깨진 범종만이 적막하게 놓여 있었다. 연수전과 가운루, 극락전 등 주요 전각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입구를 따라 이어지던 소나무 숲 역시 처참했다. 수백년 수령의 나무들은 검게 그을린 채 서 있거나 잘려 도로변에 쌓여 있었다. 전기톱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거목은 '자연의 시간'이 무너지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문화재 복구는 아직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주요 유산 상당수가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실제 공사는 이르면 올해 하반기 이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청송 파천면 사남고택 터는 사실상 폐허였다. 검게 탄 터 위에는 비닐과 차광막만 덮여 있었고, 수백년을 버텨온 고택은 돌무더기로 남았다. 인근 서벽고택은 가까스로 불길을 피했지만, 담장 너머 몇 걸음 차이로 생과 소멸이 갈렸다.

다만, 자연은 조금씩 회복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고운사 일대에는 대나무와 참나무류가 자라나며 초록빛을 되찾고 있다. 인공 조림 대신 자연복원을 선택한 결과다. 하지만 생태계의 회복과 달리 문화재와 사람의 삶은 여전히 더딘 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19일 오전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소실된 사남고택. 무너진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전종훈 기자

◆엇갈린 복구 속도…경제는 '재기', 삶은 '정체'

산불 이후 복구 속도는 분야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안동 남후농공단지는 대부분의 기업이 재가동에 들어가며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400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은 기업들은 여전히 손실을 떠안고 있다.

보상 문제에 대한 불만도 여전하다. 농기계는 기종당 1대만 인정되고, 농산물과 비닐하우스 피해는 보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의성 구계2리 김태은 전 이장은 "고추건조기 9대 중 1대만 보상받았다"며 "실제 피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청송 달기약수터 상가 일대에서는 재건 공사가 한창이지만, 이 역시 순탄치 않다. 과거 '눈대중'으로 정해진 경계가 재측량 과정에서 바뀌며 갈등이 발생했고, 자재비와 인건비 상승은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미 재건을 마친 일부 상가는 손님이 몰리며 활기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빈터로 남은 곳도 적지 않다. 고령 상인들에게는 다시 빚을 내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사과 묘목을 다시 심고, 무너진 공장을 일으켜 세우며, '다음'을 준비한다.

한 주민은 "잊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텨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