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폐허 위에 피어나는 예술의 힘

조정윤 부산문화재단 문화시민본부장 2026. 3. 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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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윤 부산문화재단 문화시민본부장

전쟁이 남긴 것은 폐허와 상처뿐이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예술을 피워 올렸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은 전쟁의 폭력에 무너진 인간성과 문명을 복원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었다. 폐허를 마주한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는 멈추지 않았다.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힘이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 이후 피정복지의 공예와 건축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페르세폴리스라는 문명의 집적지를 만들었다. 로마는 개선 행렬을 통해 전리품을 전시하며 예술을 권력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슬람과 오스만 제국 역시 전쟁 이후의 질서를 모스크와 도서관, 과학연구소의 건축 속에 담아냈다. 폭력이 문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술이 자리했다. 근대 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학술 탐사와 유물 수집은 루브르 박물관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대영제국 또한 식민지 전쟁을 통해 확보한 문화유산을 박물관에 축적하며 문화적 패권을 공고히 했다. 전쟁의 상흔 위에 국가의 정체성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전쟁 이후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예술은 저항과 증언의 언어가 되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한 화면에 응축했고, 로베르트 카파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으로 전쟁의 진실을 기록했다. 추악한 전쟁의 주체였던 군인들조차 폐허 앞에서 심미적 감수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1945년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에 참여했던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오 신이시여, 이 아름다운 도시에 정녕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는가”라고 망설였다는 일화는, 전쟁의 명령 앞에서도 인간이 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아름다움의 감각’을 보여준다.

전쟁의 끝 무렵에는 또 다른 전쟁이 있었다. 2차 대전 말기 유럽에서는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한 ‘골동품 전쟁(Art War)’이 벌어졌다. 영화 ‘모뉴먼츠 맨’의 실제 모델이 된 전문가들은 파괴 직전의 예술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전후 독일 시민이 폐허 속에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오페라하우스와 박물관의 재건이었다는 사실 역시, 삶의 회복이 예술에서 시작된다는 집단적 합의를 보여준다.

세계 3대 공연예술축제의 탄생은 포스트 워(post war) 현상의 결정체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1차 대전 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을 화해시키기 위한 평화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1947년 출범한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과 아비뇽 페스티벌은 전쟁으로 분열된 유럽을 예술로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이 장면은 오늘에도 반복된다. 작년 10월 세토우치 국제예술제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국립미술관 부관장은 폭격 속에서도 작품을 해외로 옮기고 디지털 전시를 이어가며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있었다. 예술은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 국가의 기억이자 공동체의 정체성이라는 그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 미국과 이란 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또 하나의 문명적 위기를 예고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스파한의 이맘 모스크,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시라즈의 하페즈 묘역처럼 수천 년을 이어온 페르시아 문화유산 역시 위협받을 수 있다. 이란의 문화는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자산이다. 전쟁은 언제나 자신이 지키겠다고 말한 가치까지 파괴해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단호하게 평화를 말해야 한다.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멈추기를, 더 이상의 파괴가 확산되지 않기를, 무엇보다 찬란했던 페르시아 문화가 상처 입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역사는 말한다. 전쟁이 끝나면 인간은 다시 예술을 찾는다. 그러나 더 나은 선택은 예술이 폐허 위에서 다시 피어나기를 기다리기 전에 전쟁을 멈추는 일이다.


세계의 모든 전쟁이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미국-이란의 무력 충돌이 멈춘 뒤, 내가 사랑해 온 마린스키와 볼쇼이 발레의 무대를 다시 보고, 우크라이나 국립미술관에서 그들이 지켜낸 작품을 직접 마주하며, 이스파한의 페르시아 문명을 평화로운 하늘 아래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간절한 나의 예술 버킷 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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