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당담] 그림 그리기가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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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는 놀라운 활동이다.
그림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양의 시각 데이터를 분석하고, 걸러내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핵심적인 속성을 추출해낸 결과물이다.
법도 염치도 없는 막무가내 정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공포에 떨 때 유시민 작가가 <침팬지 폴리틱스> 라는 그림을 보여줬다. 침팬지>
침팬지 그림은 윤석열 정부를 견뎌낼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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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단순화는 분란 키우고 혼란 가중

그리기는 놀라운 활동이다. 단순한 손기술이 아니라 고도의 인지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양의 시각 데이터를 분석하고, 걸러내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핵심적인 속성을 추출해낸 결과물이다. 아이들 그림도 마찬가지다. 누굴 그렸는지 알아차릴 정도로 아이들은 대상의 특징을 압축해서 표현한다. 아이들은 또 그리기를 통해 심리적인 '통제감'을 느낀다. 제아무리 크고 막강한 상대라도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순간 공포와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어른들에게도 그림이 필요하다. 너무 복잡하거나 압도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심리적 통제감을 찾기 위해 우리는 무던히도 '그림'을 찾는다. 지난 윤석열 정부 때 특히 그랬다. 법도 염치도 없는 막무가내 정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공포에 떨 때 유시민 작가가 <침팬지 폴리틱스>라는 그림을 보여줬다. 수컷 우두머리 알파 메일이 약자를 돌보는 '보안관 행동'을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유혈사태를 통해 권좌에 오른 니키가 보안관 행동을 등한시하다가 쫓겨난 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 내심 안도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평생 약자를 돌보다 종양으로 앓아누운 아모스를 동료 침팬지들이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는 장면에서는 깊이 감동했다. 침팬지 그림은 윤석열 정부를 견뎌낼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그림이 언제나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다. 미술 교육학자 자넷 굿리지는 사람들은 한 번 습득한 '그리기 공식'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산은 세모'라는 공식이 자리 잡으면 실제 산의 복잡한 능선을 관찰하기보다 자기만의 도식을 반복한다. 세모가 아닌 산을 보여줘도 그럴 리가 없다며 배척하기 십상이다. 사실 그림은 인지 활동에 엄청난 효율성을 제공한다. 핵심 특질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화는 필연적으로 전형화를 동반한다. 미세한 변화와 새로운 특질은 간과되기 쉽다.
지난 18일 유시민 작가가 유튜브 채널 '매불쇼'에 출연해 그림 하나를 내놓았다. '가치'와 '이익'을 양쪽 끝에 놓고 이재명 지지자를 A⸱B⸱C 세 부류로 나눈 다이어그램이었다. 그는 이익 추구형 B그룹을 겨냥하며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 제일 먼저 돌 던질 사람들이라고 직격했다. 상당히 B인 나는 졸지에 잠재적 투석자가 됐다. 이날 방송 이후 온 사회가 'A⸱B⸱C 타령'으로 시끌벅적하다. 비판하는 목소리가 제법 거세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상황을 명쾌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침팬지 그림 때와는 반대되는 현상이다.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를 쓴 베티 에드워즈는 익숙한 기호에 의존할수록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머릿속에 저장된 '전형적인 의자(기호)'에 집착하면 비스듬히 선 '실제 의자'를 정확하게 못 그린다. 아는 대로 그리는 습관이 '보는 능력'을 퇴화시킨 것이다. 일상을 살아갈 때 세상을 쉽게 이해시키는 단순하고 명쾌한 그림이 때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림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번 정부는 윤석열 때처럼 노골적인 단순 의지가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예전에 써먹던 어설픈 그림으로 접근했다가는 이번처럼 분란을 키우고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 때로는 모호하고 불편한 상황을 어르고 달래면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림 그리기가 능사가 아니다.
/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