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 역사 바로 세우기로 이어진 ‘제주·남해’ 연대
“30년 전부터 남해 지역에서 박진경 동상 철거 운동”

제주4.3 당시 제주도민들의 학살을 키운 박진경 대령이 최근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가운데, 정부가 지정 취소를 검토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30년 넘게 남해군 박진경 동상 철거를 위해 노력해온 경상남도 남해군민들이 제주를 찾았다. 남해군민들은 "박진경 동상을 철거하고, 역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진경동상철거남해대책위원회 제주4.3순례단은 21일부터 22일까지 제주를 방문했다. 1박 2일 간의 짧은 일정 동안 순례단은 4.3평화공원,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 그리고 제주시 중산간(연동 2488-443)에 위치한 박진경 추모비를 찾았다. 순례단에는 남해촛불행동(대표 박옥섭), 진짜남해청년회(대표 윤동권) 등이 참여했다.
이번 방문은 4.3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박진경 동상 철거 운동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졌다.
남해군 이동면에 위치한 앵강공원에는 박진경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박진경의 양아들인 전 국회의원 박익주 씨 주도로 1990년 4월에 세웠다. 동상에는 '공비잔당 소탕작전 중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최근 들어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논란이 불거지면서, 동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다시 높아졌고 철거 운동의 동력을 다시 만들고자 제주를 방문했다는 설명이다.
박진경은 1918년 남해군 남면에서 태어나 일본육군공병학교를 마친 뒤 육군 소위로 제주에 복무했다. 해방 후 9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해 약 한 달 남짓한 기간 수천 명의 민간인을 체포하는 등 강경한 진압 작전을 전개한 인물로 전해진다.
특히 1948년 5월 6일 제주도에 와서 40일 남짓 강경한 진압 작전을 벌였고 그 대가로 상관을 앞질러 대령으로 특진했다. 그 무렵 미군 비밀보고서에 "3000여 명이 체포됐다"고 기록될 정도로 박진경은 무리한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포로'로 끌려오는 이들이 "12~13세 되는 소년이며 60이 넘은 늙은이며 부녀자"라며 보도했다. 강경 작전을 펴던 박진경은 결국 그해 6월 18일 부하인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게 암살됐다.
박진경 대령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는데, 미군정 시기였던 사망한 시점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무공훈장 수여 시점을 고려하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 또한 나오고 있다.
"상훈법상 '무공훈장'은 대상이 되는 인물과 공적은 국가 주체의 군인 또는 경찰 등이 적과의 교전상황에서 세운 공적을 의미하는데, 1948년 제주 4.3 과정에서 미군정청 조선경비대 제11연대장으로 근무하다 피살된 박진경의 활동은 대한민국 상훈법에서 규정된 '무공훈장' 수여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주 방문에 동행한 정현철 전 남해군수는 "박진경의 양아들인 박익주는 남해군에서 국회의원을 냈고, 그의 손자 박철균도 장군 출신이다. 때문에 그동안 남해 지역사회 안에서 박진경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4.3의 진실이 알려지고 젊은 세대들의 역사 의식이 높아지면서 박진경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본격화됐다"고 남해군의 상황을 들려줬다.
남해촛불행동 등은 앞으로 매년 제주를 찾아 4.3 현장을 방문하면서 두 지역의 역사 연대를 계속 이어갈 방침이다. 특히 앵강공원에 세워진 박진경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철거가 어려울 경우 제주 사례를 참고해 동상 옆에 박진경의 행적을 알리는 진실비를 건립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정현철 전 군수는 "'박진경의 과오, 남해군민들이 사죄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을 제작해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에 오니 도민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역사 정의가 바로 선 뒤에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나 행정이 시혜적으로 조치하듯이 동상을 철거하면 정권에 따라 다시 엎어지기 마련이다. 궁극적으로는 역사 정의의 실현은 성숙한 국민 의식과 지속적인 시민 운동에 달려있다"며 제주와 남해를 잇는 역사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