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쟁 규탄” 글로벌 지식인 연대 주도한 철학자


문성훈 | 서울여대 교수 (현대철학)
2003년 5월31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과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에는 당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를 규탄하고, ‘국제법에 기초한 세계정치’의 필요성, 그리고 이를 위한 유럽의 연대를 역설한 공동 성명서가 실렸다. 이 성명서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집필했지만, 하버마스의 요청에 따라 자크 데리다가 이글에 동의함으로써 공동성명서가 되었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했고, 움베르토 에코, 잔니 바티모, 리처드 로티, 줄리아 크리스테바, 폴 리쾨르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많은 학자와 비판적 지식인이 이글에 동조하는 칼럼을 자국의 주요 일간지에 기고함으로써 미국의 전쟁을 규탄하는 글로벌 연대가 형성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거사를 주도했던 하버마스가 지난 16일 향년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버마스는 정치인도 아니고, 시민운동가도 아니다. 그는 비판이론의 요람으로 알려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 대표자이자, 현대 독일 사회철학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철학자다. 흔히 그의 철학은 ‘의사소통행위 이론’이라는 대표적 저작이 말해주듯 의사소통의 철학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보다 나은 근거 제시를 통해 합의를 형성하는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에 주목하면서, 이를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대안적 합리성으로 발전시키려 했고, 이를 토대로 담론 윤리, 숙의 민주주의, 법철학, 그리고 이원적 사회이론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도구적 합리성이 의사소통에 기초한 우리의 생활세계를 파괴하는 것을 현대사회의 핵심적 문제로 비판했다.
이렇게 볼 때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를 정립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게 의사소통은 철학적 탐구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버마스는 포퍼와 알베르트와의 실증주의 논쟁, 가다머와의 해석학 논쟁, 루만과의 사회체제 논쟁,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선 모더니티 논쟁,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롤스와의 논쟁, 진리 개념에 관한 로티와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문적 논쟁을 통해 의사소통을 실천했다.
그리고 일찍이 그는 나토의 핵무장에서부터 독일의 과거 청산, 대학 개혁, 그리고 오늘날에는 유럽 통합과 독일 우경화 문제 등 수많은 사회 문제에 관해 대화하고 토론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제기된 그의 주장이 다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가 단지 이론에 머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공론장에 참여하여 의사소통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과거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불분명한 이 정체불명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초등학생을 비롯해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살상된 그 비참한 상황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 정부도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에 반기를 들거나 중재에 나서지 않고, 그저 전쟁에 대한 지원 요청만을 회피하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과연 누가 각국의 정부를 움직일 수 있을까? 하버마스에게는 분명한 답이 있다.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된 공론,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시민적 연대가 그 답이다. 시민은 주권자요, 정부는 주권자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그러나 개별 정부만으로 미국을 제어할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세계적 차원에서 형성된 공론과 이를 매개로 한 글로벌 연대만이 그 답이라고.
한때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맞서 글로벌 연대를 형성하려고 했던 하버마스가 이젠 고인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하다. 이 자릴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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