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여유조차 없는 시대, 멜로가 달라졌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6. 3. 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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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만남부터 가성비 관계, 비연애 선택까지
《월간남친》·《미혼남녀》에 담긴 청춘의 현실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넷플릭스 《월간남친》 스틸컷 ⓒ넷플릭스

바야흐로 멜로의 계절이다. 하지만 최근 쏟아지는 멜로 드라마를 들여다보면, 연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분명히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넷플릭스 《월간남친》과 JTBC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샤이닝》이 그렇다. 이 멜로들이 투영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일까.

사실 넷플릭스 시리즈 《월간남친》은 다소 억울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야심에 찬 설정에 현세대의 연애관을 짚어 무게감 있는 메시지까지 담은 작품인데, 주인공 서미래를 연기한 지수의 연기력 논란만 무성해서다. 연기력 논란을 차치하고 보면 《월간남친》은 인공지능(AI)과 '연프(연애 프로그램)' 시대의 연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멜로가 아닐 수 없다.

현실과 가상 사이, 《월간남친》의 연애

《월간남친》은 웹툰 PD로 살아가며 하루하루 유명 작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지친 서미래가 어느 날 '월간남친'이라는 가상 서비스를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서비스에 접속하면 현실과 다름없는 가상세계가 펼쳐진다. 서미래는 그 안에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는 최시우(이수혁 분) 같은 부자 남친을 만나기도 하고, 대학 시절로 돌아가 서은호(서강준 분) 선배와 첫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또 테러리스트와 맞서는 국정원 요원과의 액션 로맨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원수지간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경우의 수는 무려 900가지에 달한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서미래는, 매일 마감에 쫓기는 답답한 현실보다 퇴근 후 디바이스만 착용하면 무엇이든 가능한 '월간남친'이라는 가상세계에 점점 빠져든다.

이 설정은 일찍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가 보여줬던 AI 시대의 '과몰입'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젊은 세대의 달라진 연애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다. 《솔로지옥》이나 《하트시그널》 《환승연애》 같은 연애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지금, 젊은이들은 연애 그 자체보다 연애 프로그램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여기에는 결혼은 물론 연애에도 상당한 비용이 드는 현실, 그리고 그 부담 때문에 연애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세태가 깔려 있다. '월간남친' 무료 체험 기간이 끝난 서미래가 월 구독료 50만원을 내야 계속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 현실을 정확히 겨냥한다.

'현실에서 연애할 때 월 50만원 미만으로 지출했는가?' '현실에서 서은호보다 더 멋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는가?' '월간남친을 하면서 월 구독료 외에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있는가?' '월간남친이 나의 커리어에 방해되는가?' '월간남친이 나의 행복을 증진하는가?' 스스로 던진 이러한 질문들에 서미래는 현실 연애보다 월간남친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연애 대신 연애 콘텐츠를 소비하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월간남친》이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을 통해 현세대의 달라진 연애관을 드러낸다면, JTBC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은 좀 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연애에 서툰 청춘들을 보여준다. 더 힐스 호텔의 구매팀 선임인 이의영(한지민 분)은 일 잘하는 커리어우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저 《월간남친》의 서미래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일에 매달리다 보니 연애는 초보다.

그래서 뒤늦게 연애를 해보고자 주변의 도움으로 소개팅을 시작한다. 별의별 다양한 남자를 만나보지만, 그중에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한 명은 목공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공대남 스타일'의 송태섭(박성훈 분), 또 한 명은 연극배우이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 신지수(이기택 분)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의영의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JTBC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스틸컷 ⓒJTBC

일에 매달리다 보니 연애는 초보인 청춘들

너무나 평이해 보이는 구도지만,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은 마치 연애 프로그램의 문법을 드라마로 옮겨온 듯한 정석적인 과정들을 담는다. 첫 만남, 첫 데이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또 이의영이 여러 소개팅을 거쳐 연애할 남성을 선택하는 과정 역시 연애 프로그램을 닮았다.

물론 드라마 특유의 극적 구성들이 펼쳐지지만, 이 멜로는 좀 더 현실적인 면이 있다. 판타지로만 존재해 손에 닿지 않던 멜로가, 좀 더 손에 닿는 느낌에 가깝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운명적으로 만나지도 않고, 직업적 위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다만 '효율적으로' 만나고, 그 안에서 알콩달콩한 감정들을 쌓아간다.

과거 멜로는 '운명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물론 지금도 이런 서사를 담은 사랑 이야기가 여전히 등장하지만, 이제 운명적인 사랑은 현대극보다는 사극에 어울릴 것 같은 뉘앙스를 준다. 또한 신데렐라나 남데렐라 설정 같은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도 식상해졌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해 더 이상 판타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랑의 이해》나 영화 《만약에 우리》처럼, 더 이상 사랑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더 큰 공감을 얻는다. 이들 작품 속 남녀들은 사랑으로 현실적 제약을 넘어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무거운 현실이 드라마나 영화 속 판타지마저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을 짓누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JTBC 《샤이닝》 스틸컷 ⓒJTBC

최근 방영되고 있는 JTBC 《샤이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작품 속 태서(박진영 분)와 은아(김민주 분) 사이를 가로막는 현실의 장벽들은 너무나 무겁다. 태서는 어린 시절 자동차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고, 동생마저 다리를 절게 되자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은아 역시 엄마가 집을 나가고, 우울증에 걸린 아빠의 보호자로 살며 꿈조차 꾸지 않던 청춘이다.

어찌 보면 사랑조차 사치처럼 보이는 이 청춘들이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은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이들은 만날 시간조차 없어 멀어진다. 과연 이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이들의 사랑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보게 되는 멜로 드라마다.

멜로는 사랑을 다루는 장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시대의 현실이 반영된다. 현실과 로맨스 사이에서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극의 무게는 달라질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최근의 멜로들은 연애가 쉽지 않은 현실이 담겨 있다. 이들 연애에서 드러나는 어려움은 과거처럼 빈부 격차나 신분, 직업 같은 서로 다른 위계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일에만 몰두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생긴다. 연애하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연애 자체를 할 여유가 없어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간남친》은 현실 대신 가상 연애로 도피하고,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은 부담을 덜어낸 '가성비 연애'를 그린다. 반면 《샤이닝》 속 남녀들은 지독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사랑을 잃는 과정을 보여준다.

멜로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런 청춘 남녀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삶이 이토록 무거운 현실에 질식되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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