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모습을 뒤바꾼 기차시간표 그리고 AI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김상욱 2026. 3. 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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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물의 탐구가 인간을 죽이는 일로 귀결된다면 그 앎은 과연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을 위한’ 격물치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인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사람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년 가까이 유럽에서는 세계대전 규모의 큰 전쟁이 없었다. 크림전쟁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있지만, 그 규모와 참혹함 면에서 사망자만 2200만명에 달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 돌입할 필연적 이유나 강한 동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식민지를 두고 서로 경쟁하며 세계를 제멋대로 주무르던 열강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밀 외교를 통해 복잡한 군사조약을 맺었고(조폭이 패거리를 만든 거랑 비슷하다), 한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자 조약에 엮여 줄줄이 전쟁으로 끌려 들어갔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 경쟁의 선발 주자인 영국, 프랑스와 후발 주자인 독일 사이의 갈등이 터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A. J. P. 테일러의 〈기차 시간표 전쟁〉은 기차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당시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 도입된 국민개병제를 기초로, 유사시 군인 수백만 명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승리의 관건은 ‘엄청난 병력을 누가 먼저 전장에 배치하느냐’였다. 먼저 전투 준비를 마친 나라에서 공격을 개시하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쪽은 무조건 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시적소(適時適所)에 충분한 병력이 있어야 승리한다는 것이야말로 나폴레옹 전쟁이 준 교훈이다. 문제는 많은 병력을 정확한 위치에 빠르게 배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KTX로 100만명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시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경부선 기준 주말 KTX는 하루 약 130회 운행하며 20만명 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즉, 지금의 고속열차로도 이동에만 최소 5일이 걸릴 거란 이야기다. 당시 프랑스는 300만명이 넘는 인원을 모아 무기와 군복을 지급하고, 부대로 편성하고,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국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우리나라는 철도 라인이 몇 개 없지만 프랑스나 독일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철도망을 가지고 있었다. 병력 이동에 관한 기차 시간표를 면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유럽 각국은 전쟁 발발 시 병력 이동에 대한 ‘기차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간표는 너무 정교하여 쉽게 바꿀 수 없었다. 더구나 일단 병력이 동원되기 시작하면 중간에 수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뒤죽박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쟁에서 패배를 의미한다.

줄줄이 이어진 선전포고 뒤에는

빠른 병력 동원이 승부를 가르는 상황이었기에 병력 동원 선포가 곧 전쟁 선포인지에 대해 모호성이 생기게 되었다. 몇몇 나라는 일단 동원을 하고 전쟁 선포 여부는 나중에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나라는 상대의 병력 동원을 사실상 전쟁 선포로 받아들였다. 동원의 기미만 보여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길 수 있었다. 병력 배치가 늦은 나라가 절대적으로 전투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7월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하자, 7월25일 세르비아는 병력 동원을 결정한다. 그 뒤 유럽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7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7월30일 러시아가 병력 동원을 결정했으며, 독일은 8월1일 러시아에, 8월3일엔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다. 8월4일엔 영국과 벨기에가 독일에, 독일은 벨기에에 전쟁을 선포하고, 8월6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8월12일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한다. 한 나라가 병력을 동원하는 순간, 군사조약으로 묶인 다른 나라들 역시 줄줄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병력 동원을 위해 촘촘하게 짜인 기차 시간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전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은 병력 동원 경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동원된 많은 병력은 결국 ‘기관총’이라는 기계를 향해 돌격하다가 사라졌다. 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고도 유럽은 다시 2차 세계대전에 휩쓸린다. 이 전쟁의 사망자는 5500만~85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며 1차 세계대전 직전과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우크라이나 군인이 광섬유로 조종되는 1인칭 시점 드론을 시험 운용하고 있다. ⓒEPA

지금 인류는 인공지능이라는 신기술의 등장에 한편으로 환호하고 또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을 거라는 두려움도 크지만, 진짜 두려움은 무기에 사용될 가능성 때문이다. 원자폭탄이라는 무기도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지만, 너무나 강력한 무기라서 오히려 사용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지금까지 큰 전쟁의 발발을 억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다르다.

2022년 2월2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향하는 도로에 러시아의 전차, 장갑차 및 각종 군용차량이 64㎞에 걸쳐 늘어서서 진격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목격된 최대 규모의 기갑부대였다. 키이우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 이 부대는 철수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크라이나는 대전차 무기를 탑재한 드론들이 러시아 전차를 파괴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드론 한 대 가격은 50만원 안팎, 러시아의 최신예 T-90 전차의 가격은 60억원에 달한다. 드론은 ‘가성비 전쟁’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2025년 8월 기준 러시아는 1만300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장갑차를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 기술의 주역이라 불리던 드론은 물류 수송이 아니라 전장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는 중이다.

드론 혹은 무인비행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실전에 사용된 무인비행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V-1 로켓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60~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AQM-34’라는 무인정찰기를 운용했고,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쟁에서 최초로 무인기에 무기를 탑재해 시리아의 방공망을 초토화했다. 1999년 미국은 크기 15㎝, 무게 40g의 ‘소형 무인기(Micro Air Vehicle·MAV)’를 개발했다. 2009년에는 살아 있는 풍뎅이에게 전자칩을 심고 뇌에 전기신호를 보내 비행 중 방향 조정에 성공했다. 일종의 사이보그 곤충이라 할 만하다. 이제 드론은 수 센티미터에서 수 미터까지 다양한 크기를 갖고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AI는 이미 인간을 지휘하고 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은 러시아는 곧 드론에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드론은 무선으로 조종했다. 러시아는 GPS 및 전파 교란 장비를 전장에 배치했고, 우크라이나의 드론은 무력화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광섬유 드론’이 등장한다. 드론에 광섬유를 연결해 유선으로 조종하는 것으로 전파 교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하려면 날아가는 드론에 광섬유가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드론에 광섬유가 담긴 통을 매달아 날아가는 동안 광섬유가 풀려나오도록 하면 된다. 마치 거미가 실을 풀며 날아가는 것과 유사하다. 드론 전투가 끝난 전장은 광섬유로 뒤덮이게 되는데, 마치 도시 전체가 거미줄로 옭아매인 것같이 보여 으스스한 느낌마저 든다.

광섬유 드론은 한계가 뚜렷하다. 날아가다가 광섬유가 나뭇가지에 걸리면 추락할 수 있고, 최대 비행거리가 광섬유 길이로 제한된다. 드론 조종사의 위치가 드러나는 위험도 있다. 유무선 조종 없이 스스로 날아가 작전을 수행하는 드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결국 AI가 탑재된 드론의 등장은 필연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AI 드론을 실전 운용 중이다. 우크라이나에 이런 첨단 AI 기술이 있었을까? 이는 다름 아닌 미국의, 정확히 말해서 ‘팔란티어’라는 미국 기업의 기술이다. 팔란티어는 2003년 CIA의 지원으로 설립된 데이터 분석 기업이다. 팔란티어뿐 아니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미국의 AI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하고 있다. AI는 드론만이 아니라 전쟁 전반에 이용되고 있다.

2023년 8월 우크라이나는 철조망, 지뢰밭, 참호 등으로 철벽 방어선을 두른 로보티네를 탈환하기 위해 고전 중이었다. 이때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AI 시스템을 이용했다. 우선 소규모 부대가 러시아 군 진지를 반복하여 정찰하고 상대편이 대응사격하는 위치를 AI 시스템에 보낸다. AI는 이 정보와 위성과 드론으로 얻은 모든 정보를 실시간 분석하여 공격할 위치와 순서 등을 결정하고, 공격에 가담할 지상부대와 공군의 행동까지 조율하여 작전을 지시했다. 적확한 공격에 러시아 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방어선이 무너지며 결국 로보티네를 포기하게 된다. 이미 AI는 전장에서 인간을 지휘하고 있다.

2월18일(현지 시각) 가자지구의 파괴된 건물 앞에서 주민들이 빵을 사고 있다. ⓒAFP PHOTO

나아가 AI는 자신의 판단으로 인간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2023년 시작된 가자지구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라벤더’라는 AI 시스템을 이용해 하마스 무장대원을 색출했다. 이 시스템은 방대한 정보를 분석해 가자지구 주민 가운데 누가 무장대원인지 판단하여 결정한다. 개인별로 점수를 매겨 점수가 어느 이상이면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라벤더 시스템에 10% 정도 판단 오류가 있었지만 전쟁 초기에는 무조건 공격 승인이 내려졌다고 한다. 가자지구에서 민간인 수만 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라벤더와 공격용 드론이 결합하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인간을 사냥하는 로봇의 미래가 현실이 되는 셈이다. 이제 AI는 정세를 분석하고 작전을 짜고 군대를 지휘한다. 21세기 우리는 기차 시간표가 아니라 AI 때문에 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난 2년간 격물치지 칼럼을 연재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물의 탐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믿기에 하는 일이다. 만약 사물의 탐구가 인간을 죽이는 일로 귀결된다면 그 앎은 과연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두운 이야기로 연재를 마치게 되어 안타깝지만,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을 위한’ 격물치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그동안 물리학자의 오지랖 넓은 글에 관심 가져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참고 도서: 〈인간 없는 전쟁〉 최재운 지음, 북트리거 펴냄/ 〈다르파 웨이〉 애니 제이콥슨 지음, 지식노마드 펴냄

※ 이번 화로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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