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내면 되지" 매년 느는 배짱 과속… 李 '차등범칙금' 카드 현실화할까
1995년 만든 범칙금 기본 틀, 지금도 그대로
해외선 韓의 7~15배… 벌금 1억 원 물리기도
이 대통령, 성남시장 때부터 '차등범칙금' 주장
정부도 일수벌금제 검토… 여론은 '찬성' 우세

지난해 10월 21일 서울 용산구 도로에서 일본인 관광객 가족을 태운 택시가 과속 운전 중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20대 일본인 부부가 골절상을 입고 생후 9개월 딸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한 달 후쯤 끝내 숨졌다. 택시 기사 강모씨는 제한 속도가 시속 50㎞인 도로에서 시속 100㎞까지 속도를 낸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와 착각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피해자 측과 합의한 점을 감안, 강씨를 지난 12일 불구속 기소했다.
일본 온라인에선 한국의 운전 문화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택시든 호텔 송영차든, 한국에서 폭주 운전은 일상 다반사"라며 "그들은 고객 안전보다 자신의 효율성을 우선시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누리꾼은 "한국은 운전이 거칠기로 유명하다"며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라고 비판했다.

단속 카메라 앞에서만 속도를 줄이는 과속 운전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악습 중 하나다. 한국에서 교통사고 사망자는 해마다 2,000여 명에 달하며, 과속이 교통사고 시 인명 피해를 낳는 주요 원인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규정 속도 위반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속도 위반 적발 건수는 2014~2016년 연 800만 건 수준이었지만, 2017년 1,184만 건으로 치솟았다. 연 1,000만 건을 넘어선 뒤엔 단 한 번도 줄어들지 않았고, 2023년엔 무려 1,772만 건을 기록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 두 배 넘게 증가한 셈이다.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2020년 3월 시행된 이른바 '민식이법' 등으로 어린이보호구역 등에서의 단속이 강화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지나치게 많은 수치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과속 11.3%는 '상습범'… 범칙금은 30년간 '동결'
가벼운 범칙금은 과속 운전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전체 속도 위반 건수의 11.3%는 '상습범'(5년간 15회 이상 규정 속도 위반)이 운전자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실효성 없는 범칙금·과태료 탓에 '배짱 과속 운전'을 하는 이들도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과속 운전 범칙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배 넘게 상승한 30년 동안 사실상 동결된 상태나 마찬가지다. 현재 도로교통법 시행령은 제한 속도를 얼마나 초과했느냐에 따라 △시속 20㎞ 이하 3만 원(이하 승용차 기준) △시속 20㎞ 초과~40㎞ 이하 6만 원 △시속 40㎞ 초과~60㎞ 이하 9만 원 △시속 60㎞ 초과 12만 원 등을 과속운전 범칙금으로 정하고 있다. 1995년 3월 1일 시행된 시행령의 '시속 20㎞ 이하 3만 원, 시속 20㎞ 초과 6만 원'에서 상위 구간을 신설했을 뿐, 기본 골격은 그대로인 형태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과속 운전 범칙금은 적게는 7.5배, 많게는 15배가량 낮은 수준이다. 예컨대 제한 속도를 시속 50㎞ 초과할 경우 한국에선 범칙금 9만 원을 내야 하는 반면, △미국은 490달러(약 73만 원) △일본은 10만 엔(약 93만 원) △호주는 1,307호주달러(약 138만 원) △독일은 400유로(약 68만 원·이상 2023년 12월 기준) 등이 각각 부과된다.
재산이나 소득에 따라 1억 원 이상의 벌금이 부과되는 국가도 있다. 스위스 보주(州) 법원은 지난해 6월 과속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프랑스 국적 재벌 A에게 "벌금 1만 스위스프랑(약 1,700만 원)을 선불로 내고, 향후 3년 이내에 유사한 속도 위반이 적발될 경우 추가로 8만 스위스프랑(약 1억3,700만 원)을 납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시속 50㎞가 규정 속도인 로잔의 한 도로에서 시속 77㎞로 운전했다는 이유였다. 핀란드에선 2002년 노키아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몰다가 적발돼 11만6,000유로(약 1억9,900만 원)을 내야 하는 처지가 돼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李 "총액벌금제, 부자엔 형벌 효과 없고 빈자엔 가혹"
"한 달 2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속도 위반으로 내게 되는 범칙금 12만 원을, 한 달에 1억 원을 버는 사람이 (똑같이) 내게 된다면 규제와 준수의 의미가 있겠느냐."
2017년 2월 이재명 당시 경기 성남시장 페이스북 글
한국이었다면 '몇 만 원 범칙금'에 그쳤을 일인데, 스위스나 핀란드에선 '1억 원대의 벌금'을 물리는 건 교통법규 위반에도 '일수벌금제'를 시행하고 있어서다. 일수벌금제는 ①죄질에 따른 형량을 '벌금일수'로 정하고 ②재산 또는 소득 수준에 따라 '1일 벌금액'(일수정액)을 산정해 ③벌금일수와 일수정액의 곱셈값을 최종 벌금으로 부과하는 제도다. 똑같은 범법 행위라 해도 벌금·범칙금은 '부(富)의 수준'을 감안해 차등적으로 매긴다는 얘기다. 특정한 법률 위반 행위에 대한 벌금을 올리자니 서민 부담이 가중되고, 그대로 두자니 부자들에겐 실효성이 없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선진국이 운영하고 있다. 1912년 핀란드가 처음 도입한 이후 스웨덴,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잇따라 채택해 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 성남시장 시절(2010~2018년)부터 공개적으로 일수벌금제를 지지해 왔다. '소득 차등 범칙금' '재산 비례 벌금제' 등 명칭을 붙인 뒤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사회적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도,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을 때도, 이 대통령 공약에는 일수벌금제가 있었다. 그의 논리는 경기지사 시절이었던 2021년 4월 페이스북 게시글에 잘 설명돼 있다. "현행법상 세금과 연금, 보험 등은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내고 있지만, 벌금형은 총액벌금제를 채택하고 있어 개인의 형편과 상관없이 획일적으로 부과한다. 같은 죄를 지어 벌금형에 처해도 부자는 부담이 크지 않아 형벌의 효과가 떨어지고, 빈자에게는 더 가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 반 년 만에 일수벌금제, 정확히는 '차등범칙금 제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 지난해 12월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교통 범칙금을 5만 원, 10만 원 내면 서민을 제재하는 효과는 있으나, 일정한 재력이 되는 사람은 (범칙금 통지서를) 10장 받아도 상관없어서 막 위반한다고 한다. 벌금은 쉽지 않을 것 같고, 범칙금이라도 재력에 따라 차등을 두자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 등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도 내렸다.
"정부 의지 있으면 시행 가능" vs "형평성 위배"
사실 일수벌금제 도입은 빈부 격차 심화가 시작된 1980년대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논의돼 온 주제다. 1995년 형법 개정 당시 "일수벌금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어느 정도 공감대도 형성됐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어서 '피고인의 재산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대검찰청은 2012년, 경찰청은 2018년 일수벌금제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다룬 연구 용역을 각각 진행하기도 했다.
여론은 찬성이 우세하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2019년 1,0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수벌금제 도입에 동의한 비율(75.6%)은 반대(24.4%)보다 월등히 높았다. 응답자들은 찬성의 이유로 "경제적 능력 차이와 상관없이 동등한 형별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도입할 때가 됐다'는 견해가 많다. 오경식 강원대 법학과 교수는 "기존의 벌금제나 과태료·범칙금 체계는 재산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겐 실효성이 없고, 재산이 적은 사람에겐 과중한 부담을 준다"며 "일수벌금제는 배분적 정의에 부합하는 제도"라고 짚었다. 이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시행 중인 상황이어서 '일수정액' 산정의 현실적 어려움도 거의 없다"며 "학계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충분히 논의·검토된 사안인 만큼, 정부 의지만 있다면 금방 시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반대론도 없진 않다. 피고인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양형이 달라지는 건 형법상 책임주의 원칙에 배치될 뿐 아니라, '죄질'보다 '재산'이 지나치게 부각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박기석 대구대 경찰학부(형법 전공) 교수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축적'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체제"라며 "재력을 범죄에 악용한 경우라면 모를까, 똑같은 범죄인데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벌금을 더 물리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범죄 예방에 중요한 건 벌금액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면 적발된다'는 확실성"이라며 "부자가 교통 범칙금을 더 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단언했다.
찬반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 도입'을 제안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원규 군산대 법행정경찰학부 교수는 "재산 상황이나 경제적 사정에 따라 벌금을 차등 부과하는 것은 제재의 실효성 확보 차원에선 도움이 된다"고 전제한 뒤 "사회적 합의를 위해 과태료나 범칙금 단계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벌금보다 한두 차원 낮은 제재인 과태료·범칙금에 먼저 일수벌금제 취지를 적용해 보는 '실험'을 통해 제도의 연착륙을 꾀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예상 밑돈 인파, 엄격한 통제, 질서정연 팬덤… BTS 공연 '무사고'로 마무리-사회ㅣ한국일보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대전 안전공업 대표, 화재 참사 이틀 만에 유족에 사과-지역ㅣ한국일보
- "여기가 공항이냐" "왜 다 막냐"… BTS 공연 앞 몸수색·통제에 곳곳서 '실랑이'-사회ㅣ한국일보
- '그알' 고개 숙였다… 제작진 "이 대통령 조폭 연루설 사과"-문화ㅣ한국일보
- 최고가격제 한계 오나… 27일부터 주유소 기름값 다시 오른다-경제ㅣ한국일보
- 문 앞까지 갔지만 못 구했다… 복지 '신청주의'에 막힌 울산 일가족 비극-사회ㅣ한국일보
- 배현진 이어 김종혁 '징계 정지' 가처분 인용… 수세 몰린 장동혁은 '마이웨이'-정치ㅣ한국일보
- 미국, 지상전 임박했나… "해병대 이어 82공수까지 추가 투입"-국제ㅣ한국일보
- 생활고에 자녀 4명과 숨진 30대 아빠... 현장엔 햄버거 봉지와 유서가-사회ㅣ한국일보
- 015B 이장우 아내, 알고 보니 백만장자 작명가 박대희… 대저택 공개까지-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