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을 버리고 기후를 산다: 샴페인 자본의 영국행 엑소더스 [전형민의 와인프릭]
실리콘밸리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기술의 심장은 반드시 캘리포니아에서 뛰어야 한다는 것. 구글의 마운틴뷰 캠퍼스, 메타의 멘로파크 본사… 이 주소들은 단순한 지번(地番)이 아니었습니다. 수천억달러짜리 브랜드 정체성이자 “우리가 세계 기술의 중심”이라는 선언이었죠.
그 상징성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지는 굳이 따질 것도 없습니다. 캠퍼스 하나에 수 조원을 들여 미술관처럼 꾸미고, 자전거 길을 깔고, 옥상 정원을 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 빛나는 자존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흔들렸고, 결정은 났습니다.
구글과 메타는 수년 전부터 유럽의 차가운 땅으로 데이터센터를 조용히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슬란드, 스웨덴의 북부 툰드라 지대. 그 이름만 들으면 ‘왜 거기까지?’라는 의문이 들텐데,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AI 서버는 열을 냅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AI 연산을 돌리면, 냉각 비용만으로도 천문학적인 돈이 증발합니다. 게다가 기후 위기로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해마다 더 잔인해지고 있죠.
반면 스웨덴 북부의 공기는 1년 내내 서늘하고, 수력발전 전기는 넘쳐납니다. AI 서버를 식히는 데 자연이 공짜로 손을 빌려주는 셈입니다. 결국 구글과 메타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렸고, 캘리포니아의 낭만보다 북유럽의 기후 데이터를 선택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상징적인 주소를 가진 기업들도 기후 앞에서는 원산지를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와인이라고 다를까요?

샴페인 하우스(샹파뉴 지역에서는 와이너리를 하우스라고 부릅니다.)들은 수백년 간 이 아홉 글자를 단순한 지역명이 아닌 일종의 금융 자산으로 만들어왔습니다. 병당 수십만원을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로요.
그런데 그 단어를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샹파뉴의 대형 하우스들이, 지금 조용히 영국 해협을 건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샴페인 하우스 떼땅져(Taittinger)입니다.
2014년, 떼땅져 가문의 수장 피에르-에마뉘엘 떼땅져(Pierre-Emmanuel Taittinger)는 영국 와인 전문 에이전시 해치 맨스필드(Hatch Mansfield)의 패트릭 맥그래스(Patrick McGrath)와 손을 잡습니다.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잉글랜드 켄트(Kent)의 백악질 토양 위에 직접 포도밭을 만들겠다는 것. 18개월에 걸친 입지 탐색 끝에 그들이 선택한 곳은 칠햄(Chilham) 인근의 개스케인(Gaskain) 농장 부지였습니다. 수백 년간 사과와 베리, 딸기, 커런트 같은 과일을 키워온 농가였는데, 대형 유통업체와의 납품 계약에서 손을 데인 농장주가 일부 토지를 매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떼땅져는 그 땅을 샀습니다. 2017년 첫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해 2020년까지 추가 토지를 매입하며 현재 62헥타르(㏊)의 포도밭을 완성했습니다. 그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도멘 에브르몽(Domaine Evremond)입니다.
설계는 건축가 지오바니 파체(Giovanni Pace)가 맡았고, 완성된 와이너리는 건물의 3분의 2가 지하에 묻힌 중력 방식(gravity-fed) 시설입니다. 영국의 구릉지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설계된 이 지하 셀러의 저장 용량은 150만병. 연간 목표 생산량은 40만 병에 달합니다.
그리고 2025년 1월, 드디어 첫 퀴베 에디션 1(Edition 1)이 출시됐습니다. 병당 50파운드(약 9만원)의 가격표가 붙은 이 와인은 와인 평론가 제이미 구드(Jamie Goode)로부터 93점을 받았고, 세계 최고 권위의 와인 미디어 비누스(Vinous)에서도 “인상적이고 우아한 데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주자는 포므리(Pommery)입니다. 정확히는 포므리를 소유한 브랑켄-포므리(Vranken-Pommery) 그룹인데요. 이들은 잉글랜드 햄프셔(Hampshire)의 알레스포드(Alresford) 인근 핑글스톤 에스테이트(Pinglestone Estate)를 선택했습니다.
샤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피노 그리를 심었고 루이 포므리 잉글랜드(Louis Pommery England)라는 독립 브랜드로 현지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시장에서 판매 중인 이 와인은 미국에서도 35~40달러선에 유통되며, 영국 남부 스파클링 와인 시장의 새로운 기준선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영국 켄트 지방에 조성 중인 샴페인 하우스 떼땅저의 ‘도멘 에브르몽’. [사진=hatchmansfield.com]](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mk/20260321174218276damg.jpg)
스파클링 와인의 생명은 산도(Acidity)입니다. 포도가 서늘한 기온 속에서 천천히 익어야 살아있는 산미와 섬세한 기포를 만들 수 있는데, 기온이 올라가면 포도는 급하게 익고 당도는 치솟으며 산도는 무너집니다. 샴페인의 그 예리하고 생동감 있는 맛의 핵심이 사라지는 것이죠.
반면 영국 남부는 어떨까요. 켄트, 햄프셔, 서식스(Sussex) 일대의 현재 기온은 20~30년 전 샹파뉴 지역이 누렸던 이상적인 서늘함과 거의 정확히 일치합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지질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프랑스 샹파뉴와 동일한 백악질(Chalk) 석회암층이기 때문이죠.
사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수천만 년 전 같은 바다 밑에 형성된 지층이 지각 운동으로 분리된 것이기 때문인데요. 지질학적으로 켄트와 샹파뉴는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그 토양 위에, 과거 샹파뉴의 기후가 고스란히 내려앉고 있는 것이 지금 영국 남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본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반응했을 뿐 입니다. 최근 영국 내 최상급 포도밭의 거래 가격은 에이커당 4만 파운드를 돌파했습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가격 상승입니다. 지난 10년 간 영국 와인 산업에 유입된 외부 투자 자본은 5억파운드(약 9900억원)를 넘어섰습니다.
도멘 에브르몽 하나만 봐도, 와이너리 건설에 투입된 CAPEX(자본적 지출·미래 이윤 창출, 가치 취득을 위해 지출된 투자 과정에서의 비용)는 1700만파운드(약 337억원)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쯤 되면 ‘취미로 영국 땅을 사는’ 게 아닙니다. 부동산 자산 가치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기후 데이터가 땅값을 바꾼 겁니다.
![샴페인에 대한 평균적인 테이스팅 노트. [출처=winefolly.com]](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mk/20260321174219543gvfg.jpg)
이 가격 방어력은 원산지 명칭 보호라는 법적 장치 덕분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백 년간 쌓인 소비자들의 집단 기억과 신화 덕분입니다. 특별한 날 마시는 술, 축배의 상징, 성공한 삶의 아이콘. 샴페인은 그 이미지가 곧 가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가격을 만들어온 사람들 자신이 자국 땅을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소비자들이 라벨을 믿고 돈을 내는 동안, 생산자들은 이미 그 라벨의 근거가 되는 떼루아(Terroir), 즉 기후와 토양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음 세대를 위한 헤징(Hedging)을 시작했습니다. 주주들의 미래 수익을 걱정해야 하는 대형 자본이 영국 해협 건너에 땅을 사고 지하 셀러를 판다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팔아온 샹파뉴 신화에 스스로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사태가 처음도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봅시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를 보면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나파 밸리(Napa Valley)의 생산자들은 더 뜨거운 빈티지를 선호했습니다. 태양이 강할수록 포도는 풍요롭고, 알코올은 높아지고, 와인은 진해졌으니까요. 로버트 파커의 점수가 지배하던 시절, 이 스타일이 곧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가 더 뜨거워지자 역설이 생겼습니다. 더워서 과숙된 포도로 만든 와인은 점수가 아닌 맛에서 망가졌고, 자본은 서늘한 소노마(Sonoma) 해안 쪽으로, 오리건(Oregon)으로, 결국은 더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라벨보다 기후를 먼저 봤던 사람들이 다음 시대의 승자가 됐습니다. 지금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역사의 유럽판입니다.
![샹파뉴 지역 와인 지도. [출처=winefolly.com]](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mk/20260321174220866xoyp.jpg)
그리고 그가 망명 이후 영국 귀족들에게 가장 열심히 권한 것이 바로 샴페인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샴페인을 유행시킨 장본인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그에게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시인의 코너(Poets’ Corner)에 안장되는 영예를 주었습니다. 외국인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죠.
떼땅져가 이 이름을 자신들의 영국 프로젝트에 붙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즐기는 일종의 유머처럼도 보입니다. 300년 전 망명 귀족이 영국인들에게 샴페인을 팔았다면, 이제 샹파뉴 자본은 영국 땅에서 샹파뉴 방식의 와인을 직접 만들겠다는 것이니까요. 그 와인잔을 먼저 받아든 런던의 비평가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에페르네(샹파뉴 지역의 대도시)의 어느 1등급 샴페인과 나란히 놓아도 빠지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죠.
그렇다고 샴페인이 갑자기 나쁜 와인이 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전히 훌륭하고, 앞으로도 훌륭할 것입니다. 하지만 ‘샴페인’이라는 글자가 지금까지처럼 무조건적인 가격 방어력을 갖는 시대는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후라는 변수가 그 방어막에 균열을 내고 있으니까요.
구글이 스웨덴 북부에 서버팜을 세우면서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었다’는 로고를 어디에도 붙이지 않았듯이, 도멘 에브르몽은 ‘켄트에서 만들었다’고 당당히 병에 새깁니다. 그리고 그 병이 93점을 받습니다. 자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면, 다음 시대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결국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살 때, 여러분이 지불하는 돈이 무엇에 대한 대가인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수백년 간 쌓인 신화에 대한 값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이상적인 기후와 토양에서 자란 포도에 대한 것인지. 그 답이 달라진다면, 병에 적힌 지역 이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와인을 한번 마셔보시오.” 300년 전 영국으로 망명한 에브르몽 남작은 영국의 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권유는 지금까지 영국을 최고의 샴페인 소비국으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 후예들이 영국의 백악질 토양 위에서 같은 말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처음 마셔본 사람들의 반응은, 3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와인이 허상의 산물이고 허구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안의 선입견을 조금만 걷어내고 와인을 봐달라는 호소입니다.
수백년의 기득권을 당당히 벗어던지고 변화를 꾀하는 와인, 기득권에 통렬한 한 방을 날리는 와인 등 돌이켜 생각해보면 와인은 지난 수천년 간 인류 역사와 함께하며 흥미로운 이야기, 매력적인 향과 맛으로 스스로를 꾸준히 증명해왔습니다.
어쩌면 우리야 말로 우리 스스로 ‘와인은 이런 것이다’ 정의 내리고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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