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한 장에 담긴 2000년 교회 역사

최주훈 2026. 3. 2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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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이야기'를 시작하며
최주훈 목사의 예배 이야기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예배 속 여러 순서들. 알고 보면 작은 것 하나하나마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000년간 그리스도교 역사를 구성해 온 많은 신앙인들이 어떤 논쟁과 고민을 거치며 각 요소마다 어떤 신학적 의미를 담았는지를 최주훈 목사가 설명합니다. 매월 세 번째 토요일 연재합니다.
*이 글은 출간 예정인 <아무도 안 물어보는 예배 이야기>(가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 편집자 주

"왜 이렇게 하는 건가요?" 예배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은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매주 받아 드는 주보, 매번 같은 자리에 인쇄된 예배 순서. 그 순서 안에 초대교회의 기억, 종교개혁의 결단, 구한말 선교사들의 열정,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그림자가 동시에 포개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우리는 예배당에 앉아 있다.

주보를 한번 펼쳐 보라. 입당송,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 기도송, 성서 봉독, 설교, 봉헌, 성찬, 축도 등등. 이 순서가 왜 이 순서대로 놓여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솔직히 말하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는 또 얼마나 될까. 무례한 질문이 아니다. 물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신학교에서도 예배학은 체계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목회 현장에서는 이미 굳어진 순서를 의심 없이 답습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질문은 사라졌고,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 관성과 타성만 남았다.

이제 연재할 칼럼은 그 관성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주보 예시. Claude AI로 생성

한국 개신교 역사는 짧다. 130여 년이니, 2000년 교회 역사에서 보면 아직 아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짧음 자체가 아니다. 짧은 역사를 '전부'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예배 형식은 사실 미국 부흥 운동이라는 매우 특수한 신학적·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다. 선교사들이 신앙의 열정을 전한 것은 귀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예배 형식에 한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기독교 예배 그 자체'가 아니라 '19세기 미국 개신교의 예배'였다. 그 예배에는 이미 종교개혁 시기에 벌어진 전례 축소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설교 중심주의가 깊이 배어 있었으며, 거기에 선교지 적응이라는 명목 아래 한 번 더 축소와 변형이 가해진 상태였다. 한국교회는 이 축소된 예배를 원형으로 물려받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축소의 과정에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경험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예배 전 묵도가 대표적이다. '묵도'라는 한자어 문제가 아니다. 이 용어는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예배의 공식적 첫 순서로 회중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그 특정한 의례 형식(liturgical form)은 어디서 왔을까.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시기, 교회는 예배 시작 전 잠시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는 이 특정한 의례 순서에 '경건'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성찬 시 사용하는 하얀 장갑도 식민지 시기 일본 의전 문화의 흔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기원을 아는 것이다. 모르면서 지키는 것도, 모르면서 버리는 것도 모두 무책임하다.

이제 시작하는 연재 칼럼은 매달 한 가지씩 질문하며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주보의 예배 순서를 비롯해 예배당 안에서 벌어지는 당연했던 일들을 하나씩 낯설게 보려고 한다. 왜 예배는 입당송으로 시작하는가. 왜 죄의 고백이 설교보다 앞에 놓이는가. 키리에와 영광송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사라졌는가. 교회의 기도는 왜 '대표 기도'라는 독특한 형태로 변형되었는가. 헌금은 언제부터 예배 순서의 일부가 되었으며, 봉헌송은 원래 어떤 기능을 했는가. 교회력이라는 게 있다는데, 왜 한국교회 대부분은 이것을 모르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의 각 순서는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기획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 순서와 의례는 2000년에 걸쳐 수많은 신앙 공동체가 기도하고 싸우고 합의하고 수정하면서 다듬어 온 결과물이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해 왔다. "예배(Liturgy)는 그 교회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다." 예배 순서 한 줄 한 줄에 신학이 담겨 있고, 그 신학에는 역사가 새겨져 있다. 예배 순서를 선택하고 바꾸고 삭제하는 것은 곧 신학을 바꾸는 것이고, 신학을 바꾸는 것은 곧 그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보의 예배 순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칼럼이 '옛날 것이면 무조건 좋다'거나 '모든 교회가 전통 예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명령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은 예배의 요소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어느 쪽이든 무방한 것'이라 불렀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루터는 곧바로 이 자유에 방향을 부여했다. 아디아포라의 판단 기준은 '교회의 건덕'(aedificatio), 곧 이것이 공동체의 신앙을 세우는 데 유익한가, 복음을 전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 기준 앞에서 예배의 요소들은 무조건 보존해야 할 유물도, 무분별하게 폐기해도 좋은 잔재도 아니다. 묻고 따지고 분별해야 할 대상이다.

이 분별이 이 칼럼의 목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미리 말해 둬야겠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의미만 알면 된다"는 말을 나는 가장 경계한다. 얼핏 성숙한 태도처럼 들리지만,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영혼만 있으면 몸은 필요 없다"는 결론에 닿는다. 그것은 고대 영지주의와 다르지 않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그러나 형식 없는 내용은 허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가 물질과 형식을 통해 전달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빵과 포도주, 물과 기름, 시편과 찬송, 서고 앉고 무릎 꿇는 몸의 언어까지, 이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이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고백 없이 기독교 예배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주보를 펼쳐 보자.

그전에 딱 하나만 귀띔해 두겠다.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주보의 예배 순서, 그 가장 오래된 원형은 기원후 155년경 로마에서 쓴 유스티누스(Justin Martyr)의 편지에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 편지에 묘사된 순서가 '성경 봉독, 권고(설교), 공동 기도, 빵과 포도주의 봉헌, 감사 기도, 성찬 분배'라는 사실이다. 지금 당신 손에 들린 주보와 뼈대가 거의 흡사하다. 1870년 전의 편지 한 장과 오늘 당신 손에 들린 주보 한 장 사이에 끊어지지 않은 실이 하나 있다. 이 칼럼은 그 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뉴스앤조이> 이사장

최주훈 newsnjoy@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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