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부터 식탁까지, 이란전쟁이 일상을 뒤흔든다 [딥다이브]
1973년 11월, 일본 도쿄 긴자거리는 네온사인이 꺼져 암흑에 잠겼고, 서독에선 일요일 차량 운행이 금지돼 아우토반이 텅 비었습니다. ‘1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보여주는 역사 속 상징적인 장면들인데요.
그럼, 이란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각국, 특히 중동 석유와 가스 의존도가 큰 아시아 국가들은 비상 상황인데요. 공장부터 식탁까지 뒤흔드는 이란발 에너지 위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3월 2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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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전쟁이 덮친 인도 식탁
LPG 가스통과 함께 충전소 앞에 긴 줄을 늘어선 사람들. 이란 테헤란에서 약 3000㎞ 떨어진 인도에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LPG 운반선 운항이 중단되면서, 인도 전역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LPG 가스 재고량이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죠. 인도엔 LPG를 취사용으로 쓰는 집이 무려 3억 가구가 넘거든요.
가스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엔 몸싸움이 벌어졌고요. LPG 가스통을 실은 트럭은 도둑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를 틈 타 사기꾼까지 판치죠. “가스를 예약하라”며 악성코드가 심어진 앱을 휴대폰에 설치하게 하는 겁니다.

인도 정부는 가정용 LPG 공급을 위해 산업용 LPG 공급을 확 줄였는데요. 그 결과 지금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식당입니다. 불이 없으니, 메뉴를 줄이거나 점심 장사를 포기한 식당이 늘어만 가죠.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주방을 유지하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석탄, 나무, 전기밥솥으로 바꾸고 있죠.”(인도 전국레스토랑협회 만프리트 싱 이사 BBC 인터뷰)
아마존 인도에선 인덕션 판매량이 30배 넘게 폭증했어요. 문제는 인도 음식이 인덕션과는 궁합이 썩 맞지 않는단 점인데요. 인기 레스토랑 ‘안나푸르나’는 메인 메뉴인 도사(남인도식 팬케이크) 판매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가스 불이 아니면, 도사의 바삭한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죠.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저희는 58년 사업을 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에요.”(제간 다모다라사미 CEO 블룸버그 인터뷰)

에너지 비상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바로 배급제이죠. 인구 1억 7000만명의 방글라데시는 지난 6일부터 ‘연료 배급제’를 시행했어요. 휘발유 사재기와 패닉 구매를 막기 위해서였죠.
주유소마다 긴 줄이 늘어서면서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서 2L를 주유했다”는 오토바이 운전자, “어제는 기다리다 못 넣었는데, 오늘도 10L밖에 못 샀다”는 승용차 운전자의 한탄이 이어졌는데요.
급기야 지난 14일 밤엔 사망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한 20대 남성이 대기줄 문제로 주유소 직원과 말싸움하다가, 직원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사망했어요.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주유소를 부수고, 버스 3대에 불을 지르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요. 결국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튿날인 15일 배급제를 전격 해제했습니다. 에너지난이 치안 불안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죠.
미얀마는 홀짝제, 필리핀은 주 4일제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장 쓸 수 있는 효과적인 카드는 수요 억제, 즉 에너지 절약입니다. 이란전쟁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앞다퉈 짠내 나는 비상대책을 발표했는데요.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태국: 공무원들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했습니다. 원격 근무 전환이 가능한 약 30%의 인원이 대상이죠. 공무원의 해외 출장도 중단했고, 더운 정장 대신 반팔셔츠를 입으라고 했어요. 사무실 에어컨 온도는 26~27도로 유지해야 하고요. 특히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의 지시 내용이 화제가 됐죠.

필리핀: 중앙 정부 부처와 공기업, 지방정부, 국립대학 등이 9일부터 주 4일 근무제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소방·병원 같은 필수 기관을 빼고 말이죠. 주 5일 근무 대신 하루 10시간씩 4일만 근무하는 식인데요. 또 불필요한 대면 회의를 금지하고, 에어컨 온도를 24도로 제한하는 조치도 함께 시행됩니다.
미얀마: 군사정권이 7일 ‘차량 번호판 홀짝제’를 시행했습니다. 이틀에 한 번만 차량 운행을 허용하는 초강력 조치죠. 위반하면 차량을 압수한다며 강한 처벌도 예고했는데요. 다만 이 홀짝제에서 전기차는 예외입니다. 그 결과 전기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기차 가격이 순식간에 몇천만원씩 뛰었는데요. 덕분에 전기차 수입업체를 운영 중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군사정권 수장)의 두 자녀는 대박이 나게 생겼습니다.
대만의 ‘11일 치 LNG’ 사투
동북아시아의 한국, 일본, 대만은 모두 ‘에너지 섬’ 같은 비산유국이죠. 석유와 LNG 공급 모두 해상을 통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요. 그래서 위기에 대비해 다른 나라보다 비축유를 더 많이 쌓아두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 208일분, 일본 254일분, 대만은 146일분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죠.
액화천연가스(LNG) 비축량은 석유보단 적습니다. LNG는 원래 보관하기가 까다롭거든요. 그냥 탱크에 담아두면 되는 석유와 달리 LNG는 초저온(영하 162도) 저장탱크가 필요한데, 이게 만들기 비싸고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으로 정한 LNG 의무 비축량은 9일 치이지만, 실제 확보해 둔 물량은 훨씬 더 많다는데요. 정부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지만, 에너지경제금융분석연구소(IEEFA)의 2023년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LNG 저장용량은 총 52일 치에 달합니다. 현재 일본은 21일 치의 LNG 재고를 보유 중이고요. 대만의 고작 11일 치를 탱크에 저장 중이죠.

그래서 이란이 카타르의 LNG 생산시설 라스라판을 공격하자, 가장 불안해 하는 나라가 바로 대만입니다. 만약 LNG 부족으로 대만의 전력 공급이 불안해진다면, 그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죠. TSMC의 반도체 공장 가동에까지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요.
급해진 대만 국영 석유기업 CPC는 최근 현물시장에서 천연가스를 대량 구매했어요. 현물로 사면 가격이 비싸고 이미 지상 저장공간도 꽉 찼지만, 그래도 사들여서 선박에 실은 채로 두기로 한 거죠. 쿵밍신 대만 경제부 장관은 4월 말까지 천연가스 공급엔 차질이 없다면서 “천연가스 부족으로 인한 전력 배급제는 어떤 경우에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이 4월에도 끝나지 않는다면 어쩌죠? 4월 말부턴 대만의 에어컨 사용량이 급증할 거라 더 걱정인데요. 대만에선 여러 대책이 논의 중입니다. 그 중 하나가 폐쇄하거나 출력을 낮췄던 석탄 화력발전소를 풀가동하는 거고요. 지난해 폐쇄된 마안산 원전의 재가동도 거론되죠.
한편, 이런 기회를 중국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18일 중국 대만사무판공실의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에너지 통일론’을 주장하며 이렇게 대만을 압박했어요. “평화로운 통일로 양안 연결망이 구축되면 대만의 전력, 천연가스, 원유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란 전쟁이 길어지면서 한국 정부도 차량 5부제 또는 10부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죠. 만약 전국적으로 민간까지 10부제를 시행한다면 1991년 걸프전 이후 35년 만의 일이 될 겁니다.
또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막히면서 요즘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완전히 비상입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이 줄줄이 ‘불가항력(Force Majeure)’, 즉 어쩔 수 없는 이유(이번엔 전쟁)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선언했을 정도인데요. 이로 인한 연쇄적 생산 차질이 걱정스럽죠. 비닐 포장지와 플라스틱 용기가 동나게 된다면, 라면·과자 같은 식품 업계까지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결국 에너지 수입국이라면 이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부디 더 이상의 확전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3월 2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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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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