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하는 사람이 왜 이 모양이에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 최초 공개

"시작부터 편하게 가려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1984년 7월 2일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장. 정주영 회장이 입을 열었다.
기업들이 수출 실적을 부풀리고 있는지 엄격하게 따져보겠다는 정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정책에 맞춰 현대그룹이 수출 목표를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보고가 나왔다. 미포조선이 1억2000만 달러, 인천제철이 6700만 달러를 감액하겠다고 했다.
정 회장은 후퇴를 유독 싫어했다. 보고를 듣자마자 말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발언은 계속됐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며 밀어붙이는 사람과 '불가능하다'며 물러나는 사람은 결과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자가 있어서, 시장이 안 좋아서 어렵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1984년 당시 현대그룹을 둘러싼 글로벌 환경은 만만찮았다. 정 회장도 전 세계 조선업 건조 능력이 실제 수요의 3배에 달한다고 판단할 만큼 공급 과잉이 심했다. 일반적인 경영자라면 수세적 경영 전략을 택했겠지만, 정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가 구조를 개편하든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 회장은 일본과 대만의 예를 들어 사장단의 분발을 촉구했다. 한국이, 현대가 일본과 대만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건 정 회장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는 "대만이 할 수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정 회장이 정신 무장만 강조하지는 않았다. 일을 해내는 데 필수적인 치밀한 방법론도 중시했다. 1984년 9월 24일 사장단 회의에서의 모습 한 토막.
현대그룹 전체 수출 실적이 연 목표의 93% 정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각 계열사 사장들을 향해 완전한 목표 달성이 가능한지 물었다. 현대중공업, 인천제철, 미포조선에서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실적이 부진한 현대종합목재의 차례가 왔다.
"현대종합목재는요?"
"해보겠습니다." 의례적인 답변이 나오자 정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달성 가능한지 확인하고 무엇을 지원해야 목표 달성이 가능한지를 말해보세요." 정 회장이 원하는 건 뜬구름 잡는 '해보겠다'가 아니라 구체적 '해결 방안'이었다.
정 회장은 질의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현대종합목재에 해결책을 제시했다. "철물과 목재가 결합된 혼합 가구를 제품화하는 건 시도하지 않습니까? 강판을 활용한 제품 개발은 어떻습니까? 아이템들을 전부 검토해 보고, 무엇을 보강해야 할지 종합적으로 파악하십시오."
정 회장은 왜 이토록 일을 되게 하는 데 집착했을까. 그는 한국 경제와 현대그룹 모두 비관론을 이겨내고 기적을 일궈냈다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1983년 11월 11일 동아일보 간부 세미나 특강 자리에서 정 회장은 "학자나 경제학 박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버텨내고 성장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3년, 정 회장이 현대그룹에 생소한 비즈니스인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의 주력이었던 건설과 중공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자동차와 반도체를 키우고자 했다.
정 회장의 반도체 사업에 대해 비판도 많았다. 미국,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정 회장은 동아일보 특강에서 이를 정면 반박했다. "반도체에 대한 회의적 시선대로라면 부자는 영원히 부자고, 가난한 사람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만 나옵니다. 이론과 논리를 들이밀면 한국은 지금까지 (반도체뿐 아니라) 성공한 게 하나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정 회장이 무조건 밀어붙였던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분별력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1984년 11월 12일 사장단 회의에서는 "우리가 사업가라면, 사업가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아예 안 하는 게 낫습니다. 해외 공사 계약했다고 자랑스러울 일 없습니다. 실리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리비아에서 공사를 하는데 선수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자 '손해 보면서 사업하지 말자'는 방침을 준 것이다.
일만큼이나 계획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무리한 계획을 세웠다가 달성하지 못한 경영자는 매섭게 비판했다. 1984년 11월 12일 사장단 회의. 현대중전기 수출 실적이 목표와 거리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 "현재 나온 실적이 목표의 절반도 안 되잖아요. 문제는 1년간 도대체 뭘 했느냐는 거예요"라고 했다. 이스라엘 수출 건이 지연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상대방과 협의해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워야죠. 그대로 넘어갈 수 없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왜 이 모양이에요"라고 지적했다.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회의 끝나면 (현대중전기) 금년 목표와 관련한 숫자를 내 방에 가져오세요. 계획을 세웠으면 미달되더라도 원인을 밝혀야죠. 그냥 그대로 넘어가지 맙시다"라고 했다.
정 회장은 계획을 실현하려면 실무자들의 이해와 협조가 필수라고 봤다. 1984년 11월 19일 사장단 회의에서 "위에서 숫자만 만들고, 밑에서 감이 없으면 그건 현실성이 없는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매년 30%씩 성장하던 현대그룹이 1983년에 목표 증가율 25% 달성조차 어려워진 데 대한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