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함대, 포성만으로 일본 문 열었다
김진형의 해양시대
![1850년대 일본에 내항한 미국 흑선 함대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joongangsunday/20260321001146147zaxl.jpg)
미국은 캘리포니아를 합병 후 태평양을 향한 해양전략을 수립하고 태평양 너머 일본으로 군함을 보냈다. 중국 무역을 위해 증기선 운용을 위한 군수 보급(석탄·물·식량 등) 기지가 필요했다. 1853년 여름 미국 해군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이 이끄는 ‘흑선(Black Ship)함대’가 일본 에도만(동경만)에 나타났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시커먼 군함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이 알고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앞선 문명의 상징이었다. 에도만에서 미 군함은 함포 포성만으로 위력을 과시하며 통상과 개항을 요구했다.
![흑선 함대를 이끈 페리 제독.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joongangsunday/20260321001147389lbug.jpg)
1868년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바로 이 뼈아픈 각성에서 출발했다. 섬나라 일본은 자원이 부족했고 육지에서 강대국과 경쟁하기도 어려웠다.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은 변화와 혁신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완전히 갈아엎었다. 2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막부(군벌) 중심의 봉건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건설에 나섰다. 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하여 바다를 지배하기 위한 국가 개조를 시작한 것이다. 군대는 사무라이 체제 대신 징병제를 도입하여 서양식으로 체계화된 중앙통제형 군대를 만들었다.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제도와 유럽의 산업, 특히 선박 건조 능력을 먼저 키웠다.
일본이 선박과 해군력 건설에 집중한 것은 일본 지도자들이 명확히 현실과 미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군력 건설 핵심은 인재 양성과 군함 건조였다.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영국 해군 장교들을 초청하여 해군 운영시스템과 전술, 훈련 방식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해군사관학교도 영국식으로 만들었다. 유럽식 조선소를 세우고 신기술을 도입하여 군함 건조 능력을 키웠다. 단순히 서양 문명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해군을 서양식으로 완전히 바꾼 것이다.
1894년 일본 함대 12척과 중국 북양함대 10척이 맞붙은 황해해전에서 일본은 전통적 강대국 중국을 완전히 제압했다.
![19세기말 청일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의 마쓰시마형 순양함 이쓰쿠시마.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1/joongangsunday/20260321001148644bjtz.jpg)
중국 북양함대의 중심에는 정원함과 진원함이 있었다. 1884년 독일 조선소에서 건조한 최신형, 대형(7220t) 군함으로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30.5㎝ 2연장(4문) 함포를 장착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철갑함으로 장갑과 화력 면에선 일본 군함보다 월등했다. 겉보기론 주포의 포탄(32㎝, 30.5㎝) 사이즈 정도에서만 일본이 우위일 뿐 중국이 일본에 질 이유가 없어 보였다
당시 황해해전이 주목받은 또 다른 이유는 신형 철갑함 건조 경쟁이 치열했던 유럽에서도 아직 없었던 근대 군함 간 전투가 동양에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제 군함과 영국, 프랑스제 신형 군함 간의 전투는 마치 유럽국가 간의 대리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군함의 크기에 좌우되지 않았다. 가장 우선적인 승패는 근대 전술과 전통 전술의 차이에서 나타났다. 약 5시간 동안의 전투는 기동력과 화력이 좌우했다. 북양함대는 약 14노트의 느린 기동으로 일자형 횡대전열을 유지하며 모든 함포를 동시에 사용하는 범선 시대 전열함이 하던 구식 전술을 고수했다. 반면 일본 함대의 일자형 진형은 약 20노트의 빠른 움직임으로 T자형 기동을 하면서 측면과 후방 공격을 자유롭게 했다. 동시에 중국에 비해 5~6배 빠르게 퍼붓는 포탄은 중국 군함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지난 10년간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훈련 결과 “훈련과 기동 전술이 철갑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해전이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이유는 중국 내부에 있었다. 북양함대는 군사 조직이 아니라 관료 조직에 가까웠다. 군의 핵심인 장교는 능력이 아니라 권력과 인맥으로 이루어져 지휘 능력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군대는 훈련이 부족했고, 방산 비리로 인해 함포는 대부분 훈련탄이나 불량탄이 사용됐다. 군 예산은 황궁으로 흘러갔고 심지어 해군 예산이 황실 별궁 건설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치 군함은 웅장했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쇳덩이 같았다. 이에 비해 일본은 체계적으로 발전된 해군과 군함의 역량을 최대치로 활용한 덕분에 이겼다. 근대식으로 변모한 일본과 낡은 체제 속에 머무른 중국과의 차이가 전쟁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중국은 철갑함이 약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군 시스템이 무너져서 진 전쟁이었다.
외부 압력 대하는 자세가 중·일 역사 갈라
중국은 앞선 아편전쟁을 통해 서양의 힘을 똑똑히 보았다. 근대 군함과 서양의 산업력을 보았고 자신의 패배 이유도 알고 있었다. 국가개혁을 위해 전개된 양무운동은 겉으로 보면 근대화 시도였지만 그 개혁에는 ‘황제 권력과 체제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군함과 무기를 도입했으나 군대 조직은 지방 군벌로 나누어진 봉건식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군 예산은 왕궁과 부패한 권력층에 의해 전용되고 낭비되었다. 중국 근대화는 근본적인 국가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제한적인 기술 수입에만 그친 껍데기 개혁이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최강이라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 무너졌다. 전쟁 패배로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영토(대만 등)와 국제적 위상을 잃었다. 정치 체제와 권력을 지키려다 국가가 무너진 것이다. 이후 동아시아 바다의 주인은 바뀌었다.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한 국가와 과거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 국가의 모습은 분명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고, 중국은 급속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해양 질서 교체는 “바다의 주인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강력한 군함을 앞세워 압박하는 외부 문명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19세기 말 동아시아에 던져진 질문이었다. 기존의 국가체제를 지키려 했던 나라와 체제를 개혁한 나라의 차이는 분명했다. 이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비슷한 선택 앞에 선 나라들이 있다. 외부 압력과 제재 속에서 독재국가들은 체제 방어냐 국가개혁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체제 방어로 정치 권력이 일시 유지되겠지만 경제 붕괴와 산업 쇠퇴로 인한 국가 위기는 국민의 삶을 계속 힘들게 한다.
역사에서 보여주는 가장 위험한 선택은 국가가 내부, 외부 압력에 직면했을 때 ‘변하는 척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지연된 몰락일 뿐이다. 국가의 가장 어려운 개혁은 기술 개혁이 아니라 권력 구조와 체제 개혁이다. 군대를 개혁하려면 관료적 사고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국가 재정을 개혁하려면 지배층의 특권부터 줄여야 한다. 교육을 개혁하려면 기존 기득권 엘리트 계층이 변화되어야 한다. 국가개혁은 체제와 권력 구조를 바꾸는 과정이다. 권력자들이 선택하는 ‘개혁처럼 보이는 변화’를 경계해야 한다. 19세기 말 동아시아 바다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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