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108년 소풍길의 마침표…'결핵 환자의 어머니' 여성숙

전남일보 2026. 3. 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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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무아(無我)의 성자 여성숙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108년 소풍 길 여정의 마침표, 인술과 무아(無我)로 일군 한국의 성자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군산봉수 아랫자락으로 고요한 슬픔이 감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전라도에 터를 잡은 후 결핵 환자들의 어머니로 살아온 여성숙 원장이 소천하셨다. 향년 108세, 그야말로 백여 년의 세월 동안 병든 이들의 곁을 지켜온 삶이었다.

이곳을 스쳐 간 이들이 고백했듯 토해낸 선혈처럼 그렇게 붉은 진달래가 몽우리 진 절기임에랴. 행여 계절을 맞추기라도 하셨던 것일까. 그이가 떠난 왕산의 한산촌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진달래 피고 돌담 아래 들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사람은 가도 역사는 남는 것, 한 사람의 일생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가신 이의 자취가 마땅히 그러한 까닭을 거듭 묵상한다.

여성숙은 1918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순탄한 길을 걷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허락된 삶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 정해진 혼사를 거부하고 집을 떠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평양의 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원에서 공부한다.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의 길을 선택한 것이 운명이 되었다.

당초 마음을 끌었던 이들은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다른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52년 전주 예수병원에서 수련의로 일하던 시절, 결핵 환자들의 현실을 목격한다. 병은 빠르게 번지고 있었지만 치료는 커녕 돌봄조차 받지 못한 채 가족에게서 버림받는 환자들이 많았다.

1953년 기준 남한 인구의 6.5%인 130만 명이 결핵 환자였다. 연간 사망률은 10만 명당 300~400명으로 추산되는 등 결핵이 가장 흔한 사망 원이었던 시기다. 그때 여성숙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라도 저들에게 가서 같이 살겠다." 그 순간부터 결핵 환자들과 함께 걷고 함께 생활하며 동행하는 길을 걷게 된다. 자신을 버린 채 오로지 환우들과 더불어 산 삶이었다.
전라도를 섬긴 황해도 여의사 책 표지와 화보

군산봉수 자락에 세운 공동체, 디아코니아 한산촌
1962년 목포에서 의원을 열었던 그는 세 해 뒤 무안군 왕산으로 들어왔다. 나는 2019년 서종옥 장로가 주관하여 펴낸 소책자 '전라도를 섬긴 황해도 여의사(인쇄나라 다컴)'에서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 왕산(旺山)과 한산촌 여성숙 원장'이라는 글을 실었다. 본 지면에 연재하던 한 꼭지이기도 했다.

마을 이름 '왕산'과 짝하기라도 하듯이 1965년 8월 15일 결핵 요양 공동체 '한산'이 문을 열었던 것을 연결하여 의미를 톺아보고자 했던 글이다. 한산의 의미는 '한 번뿐인 인생, 한 삶을 제대로 배우자'라는 데 있다.

1977년 안병무와 더불어 시작했던 '디아코니아 자매회'이기도 하다. 진달래 지천이던 한산촌을 거쳐간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다. 조현 종교전문기자가 인터뷰한 내용 중 홍성담 화백이 추억하는 한산촌이 각별하다.

"내 무릎에 피를 토하고 절명한 젊은이만도 두 명, 봄이면 붉은 피처럼 진달래가 지천에 핀 한산촌은 불쌍한 환자들이 쓰러져 가는 곳, 여선생의 헌신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지상 낙원처럼 회상되는 곳"이기에 그렇다.

한산촌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었다. 그곳은 병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배우는 공동체였다. 여원장은 환자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생활을 했다. 진찰할 때는 마스크와 장갑을 벗었다. 결핵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로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찾아오면 그는 오래도록 이야기를 들었다.
한산촌 여성숙 원장 장례식장에서

여성숙의 곁에는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있었다. 중증 결핵 환자로 처음 그를 만났던 송기득 교수는 여 원장이 건넨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삶의 의지를 찾았다고 했다.

이후 송기득은 14년 동안 한산촌 촌장을 맡아 흙벽돌과 자연석으로 병동을 짓고 공동체를 함께 일구기도 했다. 서종옥 장로에 의하면 안병무, 함석헌, 문익환, 장준하, 김지하, 홍섬담, 홍창의, 심찬섭 등과의 교우가 깊고도 넓다. 배병심 장로 역시 초기부터 여성숙의 곁을 지킨 든든한 동역자였다.

광주 YMCA 시절 인연을 맺은 그는 방사선 기술을 배워 목포의원과 한산촌에서 진료를 도왔다. 여 원장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기도 하다. 서종옥 장로는 해마다 여원장께 새해 인사를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 나도 몇 차례 동행하면서 인연이 되었다.

배병심 장로에 의하면 처방전 및 약값 계산서에 'free' 혹은 'half'라고 표시를 했다고 한다. 무슨 뜻이었을까? 목포를 중심으로 섬 지역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이 한산촌을 많이 찾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100여 명 가까운 환자들이 진료하고 투약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활과 형편에 따라 처방전 및 약값 계산서에 '완전 무료' 혹은 '절반'이라는 표시를 했던 것이다.

또 기독교 세계봉사회를 통해서 지원받은 구호품을 환자 형편에 따라 나누어주기도 했다. 일대기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늘 여성숙은 조용하게 물었다.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결핵균처럼 병들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여성숙은 몸소 이를 실천하였다.

이곳 왕산 한산촌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다시 숨을 쉬었고 갱생하였다. 송기득이 쓴 '내가 만난 여성숙, 나의 한산촌 14년의 삶'(위의 책)에서 눈에 들어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인이 당돌하게 "선생님, 어떤 사람이세요?"라고 물었다. 여성숙은 다만 "가시내 말라진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를 스스로 낮추는 겸허하고 겸손한 대답이었다고 해석한다. 말라비틀어진들 빛나는 그이의 생애가 훼손될 리 없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구한 삶 아니던가. 가장 낮은 자리를 향했던 삶, 분단 한국에 홀연히 오신 무아의 성자였다. 물질과 공명심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그 일생이 더욱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여원장은 떠나시지만, 뒤를 잇는 '언님(디아코니아 수녀를 부르는 호칭, 언니+님)'들의 헌신과 봉사도 여전히 주목되어야 한다. 지금 왕산 군산봉수 돌산에 진달래가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여원장의 유훈을 새기라는 뜻일 것이다.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결핵균처럼 병들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그이의 빛나는 108년 삶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품에서 영면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지난 2023년 여성숙 원장 세배
남도인문학팁

무아의 성자 여성숙 연보(年譜)

1918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 1930년대 초, 열일곱 살에 혼사를 거부하고 집을 떠나 평양 소학교에 편입, 여성으로서 드물게 학업의 길을 선택함. 1930년대 후반, 원산 마르다 윌슨 신학원에서 수학한 뒤 일본으로 유학, 의학 공부를 시작. 1952년 전주 예수병원 수련의사 시절 결핵 환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 결핵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길을 선택. 1956년 중증 결핵 환자였던 송기득을 만나 인연을 맺음, 이후 한산촌 공동체의 동역자가 됨. 1961년 광주 YMCA 활동을 통해 배병심 장로와 인연을 맺음, 이후 목포의원과 한산촌 진료 활동에 함께 참여. 1962년 목포에서 목포의료원을 개원, 본격적인 결핵 진료 시작. 1965년 8월 15일 무안 삼향읍 왕산리에 결핵 요양 공동체 '한산촌' 설립,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의료 모델을 실천. 1970년대 유신 시절 한산촌은 민주화 인사들이 머물며 휴식과 사색을 나누던 공간이었음.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이름난 민주화 일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 갔음. 1998년 80세로 현직에서 은퇴, 한산촌 부지 약 3만 평과 시설 일체를 사회복지법인에 기증. 2026년 향년 108세(호적은 106세)로 별세. 남도에서 결핵 환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무아의 성자, 한 세기의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다.
전라도를 섬긴 황해도 여의사 책 표지와 화보
전라도를 섬긴 황해도 여의사 책 표지와 화보
전라도를 섬긴 황해도 여의사 책 표지와 화보
한산촌 여성숙 원장 장례식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