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느긋하고 여유로운 봄 드라이브...파주로 떠나는 하루 여행

2026. 3. 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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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끔은 ‘일시정지’ 버튼이 필요할 때가 있다. 멀리 떠나기엔 마음의 짐이 무겁고, 집에만 있기엔 창밖의 햇살이 야속한 3월 중순이라면 파주 광탄면으로 방향을 틀어보길 권한다. 3월 중순의 파주는 조용히 봄을 맞는 중이다.
임진강변 언덕에는 아직 이른 봄바람이 차갑게 불어오지만, 고령산 자락의 숲속 길에는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거리도 가깝다. 서울 광화문에서 30킬로미터 남짓,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거리가 파주를 반나절 여행지로 알맞게 만들어준다.
운치 가득한 파주 보광사
영조의 효심이 깃든 천년 고찰, 보광사

파주 여행의 첫걸음은 광탄면 고령산 자락의 보광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보광사로 향하는 됫박고개는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구불구불 올라가는 고갯길의 풍광이 워낙 빼어나 ‘파주의 한계령’, ‘파주의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고개를 넘어서면 고령산 서쪽 자락에 1,100년 넘는 세월을 지켜온 보광사가 포근하게 앉아 있다. 화려함보다는 정갈한 뒷모습이 아름다운 곳으로, 3월 중순이면 대웅전 앞마당에 볕이 깊게 들어차고 퇴색한 단청 위로 봄의 온기가 내려앉는다.

파주 보광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보광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에 도선국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왕실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이 인근에 조성되면서 보광사가 그 원찰로 지정된 것이다.

용미리석불
영조는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친필로 현판을 써 달았으며, 어실각 옆에는 직접 향나무를 심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향나무는 어실각 쪽으로 가지를 뻗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실각에서 꽃피운 모자 간의 정이 나무의 기억 속에 오롯이 살아있는 듯하다. 특히 대웅보전의 외벽은 흔한 흙벽이 아니라 나무 판벽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그려진 민화풍 벽화들은 마치 오래된 서적을 한 페이지씩 넘기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경내 뒤편에 들어선 전나무 숲이다. 50~60년 수령의 전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봄날 이 숲에 들어서면 새로 돋아나는 연둣빛과 진한 전나무 향이 뒤섞여 몸과 마음이 동시에 환기되는 느낌이 든다.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한 고찰 보광사. 경내 뒤편의 전나무 숲이 백미다.
대웅보전 안에는 1215년에 만들어진 목조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영조의 친필 편액과 함께 추사 김정희의 친필 편액도 전하고 있어 서예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보광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거대한 암벽을 몸체 삼아 세워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다. 고려 시대의 투박하면서도 당당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보물이다. 천연 암벽을 몸체로 하고 그 위에 목, 얼굴, 갓을 조각해 얹어놓았다. 두 석불은 3월의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먼 미래의 구원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들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번민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느껴지곤 한다.

감악산 출렁다리
낭만과 스릴의 출렁다리

요즘 전국 어디를 가도 출렁다리 하나쯤은 만난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퉈 세운 덕분에 한때 전국 최장을 자랑하던 다리가 금세 기록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런 출렁다리 열풍의 진원지 격인 파주에도 두 개의 출렁다리가 있다. 광탄면 마장호수의 것과 적성면 감악산이 바로 그곳이다. 같은 파주 땅에 있지만 두 다리의 성격은 꽤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얘기가 아니라, 각각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는 뜻이다.

먼저 가볼 곳은 광탄면 기산리에 자리한 마장호수다. 호수를 둘러싸고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수변 데크로드를 걷다 보면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마주할 수 있다. 이곳의 상징인 마장호수 출렁다리는 길이 220미터, 폭 1.5미터의 현수교로, 호수 수면 위 7~13미터 높이에 걸쳐 있다. 다리 한가운데 18미터 구간에는 방탄유리 바닥이 깔려 있어 발아래 잔잔한 수면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그 아찔함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인 1,280명이 동시에 건널 수 있도록 설계된 튼튼한 구조물이다.

감악산의 모습
마장호수 출렁다리가 ‘낭만’이라면, 감악산 출렁다리는 단연 ‘스릴’이다. 길이는 150미터로 마장호수보다 짧지만, 지상 45미터 높이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아찔한 체감을 선사한다. 2016년 9월 개장 당시 전국 최장 산악 현수교였던 이 다리는 도로 개설로 잘려나간 설마리 골짜기를 다시 이어 붙인 것이다. 파주시는 이 다리에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라는 별칭을 붙였다. 감악산 일대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글로스터 대대의 전투를 기리는 뜻이다.

다리에 오르려면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소나무 향 가득한 산길을 오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 다리 위에 서면 아래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가 아스라이 보이고, 초속 30미터 강풍에도 견디도록 설계된 다리가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다리를 건넌 뒤 운계폭포와 범륜사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더하면 반나절 산행으로 손색이 없다.

(왼)감악산 출렁다리 (오) 마장호수 출렁다리, 마장호수 산책로
두 곳을 하루에 모두 돌아보고 싶다면 마장호수에서 오전을 보내고 감악산 출렁다리에서 오후를 마무리하는 순서가 좋다. 호수의 잔잔함으로 하루를 열고, 산의 아찔함으로 하루를 닫는 셈이다. 파주는 역시 한 가지 얼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곳이다.

동양의 연못과 서양의 정원이 한 울타리 안에

이름부터 그림 같다. 푸를 벽(碧), 풀 초(草), 연못 지(池). 즉 벽초지(碧草池)는 파란 풀밭 가운데 연못이 있다는 뜻인데, 실제 풍경도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에 자리한 벽초지문화수목원은 12만 제곱미터 땅 위에 1,400여 종의 식물과 동서양의 정원 27개를 품은 곳이다.

벽초지수목원
원래 이 땅은 개인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1997년 몇 그루의 나무와 얕은 물가에서 시작해 9년에 걸친 조성 공사 끝에 2005년 수목원으로 문을 열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설립자와 예술 조경을 꿈꾸는 화가의 만남에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그 이력이 수목원 곳곳에 배어 있다. 단순히 나무를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식물과 조각, 정원 설계가 하나의 작품처럼 어우러진다.

수목원의 구성도 독특하다. 크게 6개의 테마 공간 안에 동양 정원과 서양 정원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이 물가에 드리운 벽초지 연못과 그 위에 놓인 무심교는 한국 전통 산수화를 그대로 옮긴 듯하고,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유럽 조각 공원과 베르사유풍 분수대가 나타난다. 정원 하나를 지나는 것만으로 나라와 시대를 건너뛰는 기분이 든다. 동양의 ‘지베르니 정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벽초지수목원
3월 중순은 벽초지가 천천히 깨어나는 시간이다. 수선화와 크로커스가 먼저 고개를 내밀고, 4월로 접어들면 튤립이 정원을 화사하게 물들이며 봄꽃 축제가 시작된다. 이 수목원은 계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의 튤립과 야생화, 여름의 수국과 짙은 녹음, 가을의 국화와 단풍, 겨울의 설경까지. 어느 계절에 와도 허탕 치지 않는다는 것이 수목원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곳은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아가씨’를 비롯해 수백 편의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주말이면 카메라를 든 방문객들이 많다. 한적하게 걷고 싶다면 평일 오전이 좋다. 300년 수령의 사시나무들이 늘어선 ‘비움의 길’을 걸으며 끝에 보이는 빛의 문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다 보면, 오래된 나무들이 전해주는 묵직한 침묵에 잠시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소는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 242. 마장호수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좌로부터 시계방향)녹슬어가는 증기기관차, 임진각 자유의 다리,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임진각 철도표지판
철책 앞에서 바람개비가 돈다

자유로를 북쪽으로 끝까지 달리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온다.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7킬로미터. 서울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운 이 자리에 임진각이 있다. 1972년, 고향을 북에 두고 내려온 실향민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망향의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세운 건물이다. 처음에는 3층짜리 건물 하나였던 이곳이 지금은 총 14만 평 규모의 관광지로 성장했다.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끊어진 임진강 철교가 보인다. 한국전쟁 전에는 신의주까지 달리던 기차가 오가던 길목이었다. 철교 옆으로는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건너온 ‘자유의 다리’가 있다. 철교는 전쟁 중 폭격으로 교각만 앙상하게 남았고, 자유의 다리는 이제 관광객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메모를 적어 리본을 묶는 장소가 됐다. 철길 옆에는 총탄 자국이 남은 채 녹슬어가는 증기기관차 한 대가 세월을 버티고 서 있다. 다시 북쪽으로 달릴 날을 기다리듯.

임진각 망배단
무거운 역사를 안고 있는 이곳이 뜻밖에도 발걸음이 가볍다. 임진각 바로 옆,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된 평화누리공원 덕분이다. 3만 평 규모의 넓은 잔디 언덕 위로 형형색색의 바람개비 수천 개가 바람에 돌아가고 있다. 김언경 작가의 설치 작품 ‘바람의 언덕’이다.

한반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바람처럼 언젠가 분단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가는 풍경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언덕 옆으로는 대나무로 만든 거대한 사람 형상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조형물 ‘통일 부르기’도 서 있다.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3월 중순의 평화누리공원은 조용하고 담백하다. 바람개비 언덕을 천천히 올라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임진강 들판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바람이 거세고 하늘이 넓다. 이 자리에 서면 ‘분단’이라는 단어가 교과서 속 활자가 아니라 피부로 닿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무겁지 않다. 봄빛 속에서 돌아가는 바람개비들이 그 묵직함을 조금씩 가볍게 만들어주는 탓이다. 역사와 일상이 겹쳐지는 공간, 슬픔과 평화가 나란히 앉아 있는 곳. 임진각은 그런 곳이다.

빛으로 그린 건축

파주 출판단지 안에 자리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파주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이다. 설계를 맡은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1992), 울프 예술상(2001),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2002, 2012) 수상한 현대 건축의 거장이다. 그는 이 건물의 설계를 시작하면서 빈 대지 위에 웅크린 고양이를 스케치했고, 그 스케치가 7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건물로 완성됐다.

미메시스 뮤지엄
바깥에서 보면 두 개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펼쳐진 백색 건물이 단순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가급적 인공 조명을 배제하고 자연광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낮 12시의 빛, 오후 3시의 빛, 5시의 빛이 각기 다른 표정을 만들어내며, 계절에 따라서도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봄날 오후의 미메시스는 특히 아름답다. 기울어진 햇살이 곡면 벽을 타고 흐르며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농담이 전시된 작품과 어우러져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1층에는 열린책들에서 펴낸 예술 서적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는 북카페가 있어, 전시를 보고 나서 책을 고르며 오후를 보내는 것도 이곳다운 시간이다.

파주 여행 정보
(위) 심학산두부마을 (아래) 단골집
심학산은 파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30분이면 정상까지 오른다. 맑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바라다 보인다. 둘레길도 만들어져 있어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모인다. 심학산 주위에 음식점들이 많다. ‘심학산두부마을’은 파주 특산품인 파주 장단콩으로 장과 두부를 만드는 집이다. 우렁이가 들어간 강된장이 맛깔스럽다. 함께 나오는 콩나물무침, 꽈리고추 멸치볶음, 느타리버섯볶음, 취나물, 가지볶음 등도 하나같이 정갈하다.
철책 바로 앞 카페 ‘포비 DMZ’
문산 읍내의 ‘삼거리부대찌개’는 50년 내공의 부대찌개집이다. 파주에는 요즘 유행하는 대형 카페들이 많다. ‘앤드 테라스’는 1,500평 실내를 온갖 식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끝까지 가면 임진각이다. 이곳에 카페 ‘포비 DMZ’가 있다. 사방이 통유리로 된 유리상자 같은 심플한 건물은 철책선 앞에 보초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실내도 미니멀하다. 커다란 탁자와 벤치 두 개가 전부다. ‘단골집’은 진짜 돼지갈비를 맛볼 수 있는 곳. 예약은 필수다. 새콤달콤한 오징어초무침도 맛있다. 매장은 오후 12~3시까지만 운영하고 3시 이후에는 포장만 가능하다.
임진각평화누리공원 놀이공원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22호(26.03.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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