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느긋하고 여유로운 봄 드라이브...파주로 떠나는 하루 여행
임진강변 언덕에는 아직 이른 봄바람이 차갑게 불어오지만, 고령산 자락의 숲속 길에는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거리도 가깝다. 서울 광화문에서 30킬로미터 남짓,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거리가 파주를 반나절 여행지로 알맞게 만들어준다.

파주 여행의 첫걸음은 광탄면 고령산 자락의 보광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보광사로 향하는 됫박고개는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구불구불 올라가는 고갯길의 풍광이 워낙 빼어나 ‘파주의 한계령’, ‘파주의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고개를 넘어서면 고령산 서쪽 자락에 1,100년 넘는 세월을 지켜온 보광사가 포근하게 앉아 있다. 화려함보다는 정갈한 뒷모습이 아름다운 곳으로, 3월 중순이면 대웅전 앞마당에 볕이 깊게 들어차고 퇴색한 단청 위로 봄의 온기가 내려앉는다.
파주 보광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보광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에 도선국사가 왕명으로 창건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왕실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이 인근에 조성되면서 보광사가 그 원찰로 지정된 것이다.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경내 뒤편에 들어선 전나무 숲이다. 50~60년 수령의 전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봄날 이 숲에 들어서면 새로 돋아나는 연둣빛과 진한 전나무 향이 뒤섞여 몸과 마음이 동시에 환기되는 느낌이 든다.

보광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거대한 암벽을 몸체 삼아 세워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다. 고려 시대의 투박하면서도 당당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보물이다. 천연 암벽을 몸체로 하고 그 위에 목, 얼굴, 갓을 조각해 얹어놓았다. 두 석불은 3월의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먼 미래의 구원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들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번민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느껴지곤 한다.

요즘 전국 어디를 가도 출렁다리 하나쯤은 만난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퉈 세운 덕분에 한때 전국 최장을 자랑하던 다리가 금세 기록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런 출렁다리 열풍의 진원지 격인 파주에도 두 개의 출렁다리가 있다. 광탄면 마장호수의 것과 적성면 감악산이 바로 그곳이다. 같은 파주 땅에 있지만 두 다리의 성격은 꽤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얘기가 아니라, 각각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는 뜻이다.
먼저 가볼 곳은 광탄면 기산리에 자리한 마장호수다. 호수를 둘러싸고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수변 데크로드를 걷다 보면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마주할 수 있다. 이곳의 상징인 마장호수 출렁다리는 길이 220미터, 폭 1.5미터의 현수교로, 호수 수면 위 7~13미터 높이에 걸쳐 있다. 다리 한가운데 18미터 구간에는 방탄유리 바닥이 깔려 있어 발아래 잔잔한 수면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그 아찔함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인 1,280명이 동시에 건널 수 있도록 설계된 튼튼한 구조물이다.

다리에 오르려면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소나무 향 가득한 산길을 오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 다리 위에 서면 아래로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가 아스라이 보이고, 초속 30미터 강풍에도 견디도록 설계된 다리가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다리를 건넌 뒤 운계폭포와 범륜사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더하면 반나절 산행으로 손색이 없다.

동양의 연못과 서양의 정원이 한 울타리 안에
이름부터 그림 같다. 푸를 벽(碧), 풀 초(草), 연못 지(池). 즉 벽초지(碧草池)는 파란 풀밭 가운데 연못이 있다는 뜻인데, 실제 풍경도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에 자리한 벽초지문화수목원은 12만 제곱미터 땅 위에 1,400여 종의 식물과 동서양의 정원 27개를 품은 곳이다.

수목원의 구성도 독특하다. 크게 6개의 테마 공간 안에 동양 정원과 서양 정원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이 물가에 드리운 벽초지 연못과 그 위에 놓인 무심교는 한국 전통 산수화를 그대로 옮긴 듯하고,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유럽 조각 공원과 베르사유풍 분수대가 나타난다. 정원 하나를 지나는 것만으로 나라와 시대를 건너뛰는 기분이 든다. 동양의 ‘지베르니 정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아가씨’를 비롯해 수백 편의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주말이면 카메라를 든 방문객들이 많다. 한적하게 걷고 싶다면 평일 오전이 좋다. 300년 수령의 사시나무들이 늘어선 ‘비움의 길’을 걸으며 끝에 보이는 빛의 문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다 보면, 오래된 나무들이 전해주는 묵직한 침묵에 잠시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소는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 242. 마장호수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자유로를 북쪽으로 끝까지 달리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온다.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7킬로미터. 서울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운 이 자리에 임진각이 있다. 1972년, 고향을 북에 두고 내려온 실향민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망향의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세운 건물이다. 처음에는 3층짜리 건물 하나였던 이곳이 지금은 총 14만 평 규모의 관광지로 성장했다.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끊어진 임진강 철교가 보인다. 한국전쟁 전에는 신의주까지 달리던 기차가 오가던 길목이었다. 철교 옆으로는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건너온 ‘자유의 다리’가 있다. 철교는 전쟁 중 폭격으로 교각만 앙상하게 남았고, 자유의 다리는 이제 관광객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메모를 적어 리본을 묶는 장소가 됐다. 철길 옆에는 총탄 자국이 남은 채 녹슬어가는 증기기관차 한 대가 세월을 버티고 서 있다. 다시 북쪽으로 달릴 날을 기다리듯.

한반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바람처럼 언젠가 분단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돌아가는 풍경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언덕 옆으로는 대나무로 만든 거대한 사람 형상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조형물 ‘통일 부르기’도 서 있다.

빛으로 그린 건축
파주 출판단지 안에 자리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파주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이다. 설계를 맡은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1992), 울프 예술상(2001),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2002, 2012) 수상한 현대 건축의 거장이다. 그는 이 건물의 설계를 시작하면서 빈 대지 위에 웅크린 고양이를 스케치했고, 그 스케치가 7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건물로 완성됐다.

봄날 오후의 미메시스는 특히 아름답다. 기울어진 햇살이 곡면 벽을 타고 흐르며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농담이 전시된 작품과 어우러져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1층에는 열린책들에서 펴낸 예술 서적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는 북카페가 있어, 전시를 보고 나서 책을 고르며 오후를 보내는 것도 이곳다운 시간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22호(26.03.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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