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못했던, 침묵해야만 했던 제주4.3 위한 시인의 진혼가

김찬우 기자 2026. 3. 20. 15:5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허영선 시인, 4.3 법정 일기와 4.3 레퀴엠 시집 발간
사진=예스24.

울어야 할 철에 울지 못했던 이들의 시린 눈동자, 법 아닌 법 앞에서 침묵해야만 했던 이들의 존엄. 지금도 우리 곁을 서성이는 4.3의 목소리를 표현한 시집이 나왔다. 

제주4.3연구소장을 역임한 허영선 시인의 신작 '법 아닌 법 앞에서-4.3법정일기',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4.3레퀴엠'이다. 출판사는 마음의숲.

'법 아닌 법 앞에서'는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과거사 형사 재심)가 201호 법정에서 진행 중인 제주4.3 재심 재판을 다룬다. 허영선은 "주문, 피고인들은 각 무죄"라고 선고한 그 날의 말들을 시로 증언한다. 70년 만에 겨우 법정에서 나온 고통의 증언이다.

이를 통해 그는 훼손된 존엄을 시적으로 수선한다.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행방불명되었던 이들이 재심을 통해 존엄을 회복하던 그 역사적 찰나를 시적 언어로 포착한 첫 시도이자, 진실을 향한 시의 첫 발걸음이다. 

허영선은 재심 법정에 흐르던 유족과 생존자들의 피맺힌 증언, 그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시로 벼려냈다. 법정의 건조한 공기를 진실의 진동으로 바꾼 이 시집은, 시가 진실을 붙들고 있는 가장 뜨거운 진술의 현장이다.

허영선은 "여기선 하늘의 사람들이 출석하고 가물거리는 핏줄들이 그들과 만난다. 울음의 움막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들에 귀를 댄다. 제주 섬 어느 곳 어디에서나 부당하게 사랑을 빼앗긴 사람들, 사랑을 기다려온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녹두를 따다가

(전략)
2. 오빠에게
오빠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빠야
엄마는 오빠를 붙들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삭삭 손만 비볐대
엄마가 그랬어
밤의 창문으로 비의 손이 박박 그을 때
치매에 든 엄마가 그랬어
녹두 따다 눈앞에서 아들 하나 오꼿
놓치고 말았다고

공포에 찬 눈은 이미 그날로 돌아갔어
마을은 온통 벌겋게 벌겋게 타올랐어
지붕까지 활활
엄마의 손가락은 몇 번이고 그날을 반복했어
그러다 파르르 깡마른 엄지와 검지론
누군가를 향해 겨누는 거야
치매 밖의 엄마는 내 손을 꽉 잡고 흔들었고
나는 손과 입술과 눈빛으로 소리치는 엄마의
그날을 봤고
이윽고 창문을 넘어온 비의 몸에
흠뻑 젖은 우리의 손가락 말들은 힘을 잃었어

그 밤, 울어도 너무 울어서 붉은 눈이었던
길고 긴 우리들의 수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 시에 나타난 오빠, 4.3희생자 문창호(당시 17세)는 1948년 11월 하순쯤 어머니와 농사를 짓다가 토벌대에 끌려가 인천소년형무소로 이송, 징역 7년을 언도 받고 복역 중 행방불명됐다. 2022년 8월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서 그의 여동생은 오빠를 대신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4.3 재판을 담당했던 장찬수 부장판사는 "처음으로 4.3법정을 시로 다룬 생생한 증언시며, 아무도 몰랐던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내놓은 빛의 문장"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의 진실을 가슴에 새겨두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예스24.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는 제주4.3의 불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아이들, 비극을 '살아낸 역사'로 증언한 책이다. 기억의 외딴집에 갇혀 있던 이들이 당당하게 나와 봄날의 마당에 서길 바라는 마음을 시로 엮어냈다.

허영선은 4.3을 과거의 눈물로 소비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국가의 비수 앞에 학생복조차 입어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난 아이들의 시린 눈동자를 바로 보고 70년 전 비극을 우리 곁 '현재형 고통'으로 소환한다.

재일조선인 시문학 거장 김시종 시인은 "시냇가 얕은 여울처럼 눈에 띄지 않는 어운과 어조로 항상 자신을 향한 반문이 여울 물소리를 내고 있는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시집은 4.3사건에 대한 끝나지 않는 기억. 이것을 계승하는 자를 겸허히 만들고 만다. 거기서 사유의 깊이를 바다 울음의 여운처럼 진동시키는 음운의 힘.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덧붙였다. 

허영선은 시인의 말에서 "그날들 이후 돌아오지 못한 슬픈 그들에게, 천둥의 밤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모든 전쟁을 살아낸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그럼에도 한 줄 찬란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라고 말했다. 

북촌 이야기

마을에선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곡곡
곡곡
곡소리 내라 하니 곡곡

아이들은 곡을 모르니 곡곡
아이고 아이고 모르니 곡곡
곡소리 하라니 곡곡

70년 전, 그랬다

10살 미만 상주들

출판사는 "두 책은 제주4.3 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법정'과 '삶의 현장'이라는 두 축으로 재구성한다"며 "언어의 리듬과 이미지를 통해 우리 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진실을 붙들고 있는 시의 진술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를 깊게 떨리게 하는지 증명해 낸다"고 소개했다.
허영선 시인.

제주에서 나고 자란 허영선은 제민일보 편집부국장과 제주4.3평화재단 이사, 제주4.3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뿌리의 노래', '해녀들', 산문집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었겠지만', 역사서 '제주4.3을 묻는 너에게' 등을 펴냈다. 김광협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법 아닌 법 앞에서, 192쪽, 마음의숲, 1만3000원.
우린 천둥의 밤을 지나온 자들이어서, 216쪽, 마음의숲,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