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레저] 피클볼홀릭의 등장

이동경 2026. 3. 20. 14:0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클볼 전용코트에서 코치가 꿈나무들에게 피클볼을 가르치고 있다[사진/제이필드1977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정년퇴직을 2년여 앞둔 50대 후반의 직장인 A씨는 요즈음 재미있는 '놀이'에 흠뻑 빠졌다. 주말에 그렇게 즐기던 낚시도, 등산도 이제는 뒷전이 됐다.

A씨의 '최애' 놀이는 다소 생소한 피클볼(pickleball)이라는 스포츠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피클볼은 테니스와 배드민턴, 탁구의 요소가 섞인 형태다. 국내에 소개된 지는 10년 가까이 된다.

체육관이나 전용구장 등에서 4명이 복식조를 이뤄 배드민턴과 같은 크기의 코트에서 탁구의 라켓과 비슷한 '패들'(paddle)로 구멍이 난 플라스틱 볼을 때려 네트를 넘기는 형식이다.

A씨는 대학 때부터 테니스를 친 덕에 피클볼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중급 이상의 수준이 됐다. 그러나 실력을 더 키우고 싶어서 안달이다. 경기 성남시에 살면서 서울 반포와 경기 용인, 인천 등지에 고수들이 출몰하는 피클볼 전용구장으로 '원정'을 다닌다.

매일매일 피클볼을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A씨는 직장에서 퇴근 후 뻐근한 무릎에 찜질용 팩을 대고 미국 피클볼 투어 경기 영상을 분석하며 주말을 기다린다.

고교 때 배드민턴 선수를 했던 60대 후반의 B씨는 피클볼을 하다가 허벅지 근육경련을 일으켰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체육관에 나오다시피 했다. 그러더니 클럽의 한 회원과 출전한 첫 대회에서 덜컥 여자복식 우승을 거머쥐었다. 피클볼 경력이 6개월인 그는 출전자 중 연령이 높은 편이었다. '아직도 배가 고픈' B씨는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개인지도를 받는다. 그는 피클볼이 자신의 '인생 운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A씨는 골프, 테니스 등과 마찬가지로 피클볼에도 '미칠 광'(狂)자가 붙을만할 이유를 나름대로 펼친다. 골프 드라이버 클럽으로 티샷한 볼이 스위트 스폿에 제대로 맞았을 때, 테니스 라켓 스트링의 한가운데 강한 발리샷이 적중됐을 때, 패들에 볼이 정타가 됐을 때 타구음과 진동이 주는 쾌감은 모두 일종의 중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C씨는 정형외과 의사면서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다. 오랫동안 친 테니스와 피클볼을 같이하기 때문에 무리가 왔다. C씨와 같은 클럽에서 운동하는 한 마취과 의사는 진통제를 먹으면서 피클볼 코트를 찾는단다. 중독을 치료하는 의사가 오히려 중독된 것이다.

피클볼에 중독자라는 의미의 영어 접미어인 홀릭(-holic)을 붙이면 '피클볼홀릭'이다. 우리식 표현이라면 '피클볼광'쯤 되겠다. 미국에서는 피클러(pickler), 즉 피클볼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피클볼홀릭으로 변해가는 일이 흔하다. 미국의 피클볼 동호인 수는 3천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테니스 동호인 수를 뛰어넘었다. 피클볼이 가장 빠르게 퍼지는 중독이라는 말까지 미국에서 나온다. 경기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에서 복무 중인 미 육군 K씨는 용인의 전용 구장으로 부대 동료들과 피클볼을 하러 자주 온다. 그의 가방 속에는 고가의 패들이 10개가 넘는다.

피클볼 코트 위에 놓인 패들과 공[사진/ 이동경 기자]

국내 피클러들에게도 이처럼 '신상' 패들에 집착하는 '장비병' 환자들이 있다. 패들의 성능이나 종류의 차이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자꾸 바꾸고 싶어진다. 장비병은 골프나 낚시광들에게 흔한데 피클볼에까지 '전염'되고 있다. 피클볼을 좀 안다는 동호인이 선호하는 패들은 50만원 안팎의 미국산이다. 웬만한 골프 드라이버 클럽 가격과 비슷하고, 일반 테니스 라켓보다 훨씬 비싸다.

피클볼 패들의 표면은 탄소섬유 또는 유리섬유로 처리됐고, 일부 패들은 내부 코어(core)에 벌집 등의 형태로 공기층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볼을 때렸을 때 경쾌한 타구음을 낸다. 이 소리를 즐기는 동호인이 많다. 미국의 한 유명 패들 제조업체는 강력한 파워와 타구음을 가진 패들을 출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패들의 타구음은 마치 큰 사찰의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목탁 소리와 비슷하다. 비싸기 때문에 '큰마음'을 먹어야 산다. 패들의 수명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 한다. 6개월~1년이라는 말도 있다. 볼을 자주 때리면 표면도 상하고, 내부 코어가 파손돼 반발력이 줄어든다. 피클볼을 처음 시작하는 비기너들은 비싼 패들에 집착하지 말고 적절한 가격의 패들로 스윙폼을 향상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코치들을 말한다.

전국의 피클볼 클럽 수는 100여개, 동호인 수는 1만명쯤으로 대한피클볼협회는 추산한다. 경인권에 클럽이 많지만, 지역의 중소도시에서 계속 생겨나고 있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 실내 체육관은 설날과 추석만 빼고 연중 피클볼 코트를 운영한다. 학교 교장이 피클볼 클럽의 회장이다. 피클볼 코트는 배드민턴 코트의 크기와 거의 같다. 피클볼 동호회는 체육관의 '터줏대감'이었던 배드민턴 동호회와 최근 '대관 경쟁'을 자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두 동호회가 감정싸움을 하기도 한다.

피클볼을 즐기는 동호인들[사진/카이로스피클볼클럽 제공]

나이가 들어 테니스가 버거운 동호인들이 피클볼로 '전향'하는 사례가 많다. 테니스 실력자들은 피클볼을 시작한 지 한두 달 만에 중상급 이상의 수준에 올라선다. 국내에서 가장 큰 인천의 한 피클볼 전용구장에는 테니스 코트도 함께 조성해 자연스럽게 서로 관심이 가게 했다. '꿈나무'들이 동시에 두 스포츠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동호회 월회비 2만~3만원대로 즐길 수 있는 피클볼은 진입장벽이 낮다. 남녀노소 간 세대를 이어주는 스포츠다. 실력이 엇비슷한 40대 직장인과 은퇴한 중년 남성이 공개 채팅방 투표를 통해 코트에서 만난다. 중학생 손자와 할머니가 패들을 들고 게임을 하기도 한다. 먼저 배운 엄마가 취업 준비 중인 딸을 체육관에 데리고 나온다. 아내가 갱년기를 극복하도록 남편이 패들을 쥐여주기도 한다. 최근 미국 피클볼 US오픈 출전자 중 최연소자는 8세, 최고령자는 80대 후반이었다.

A씨는 6개월간 피클볼을 하면서 술을 마시는 횟수도 줄어들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덕을 본다. 그러나 중독이 가져다주는 '보상'도 얻었다. 테니스를 몇십년간 해도 오지 않았던 오른쪽 팔 '테니스엘보'(외측상과염)가 생겼다. 왼쪽 무릎도 뻐근함을 자주 느낀다. 운동 횟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점점 깨닫는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미리 충분한 스트레칭을 하고, 자신의 운동 능력이나 신체 상태를 정확히 알고 강도를 이에 맞추는 것이 필수라고 한 통증 의학 전문의는 말한다. 이러면 피클볼을 '인생 운동'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AI) 해석에 따르면 탐닉은 과몰입해 통제력이 약해지는 단계이고, 중독은 그만두고 싶어도 도저히멈출 수 없는 상태란다. 탐닉이나 중독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고 몸 상태도 체크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hopema@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