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먹고 1년 굶는 비단뱀…‘위고비 넘는 비만약’ 열쇠?

박해식 기자 2026. 3. 2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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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뱀은 한 번에 자기 몸무게 만큼 먹이를 먹고 최대 1년 넘게 굶는 극단적 섭식·단식 패턴을 가졌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비단뱀은 ‘극단적 섭식·단식’ 패턴을 가진 동물이다. 한 번에 영양분을 가득 섭취한 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년 넘게 먹지 않는다.

비단뱀이 폭식 후 분비하는 한 대사 물질이 생쥐 실험에서 식욕을 억제하고 체중을 줄이는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했다. 오젬픽(Ozempic)·위고비(Wegovy)와 같은 세마글루타이드 계열 약물의 식욕 억제·체중 감소 효과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더욱 주목할 점은 기존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약물과 작용 기전이 달라 해당 약물의 일부 부작용을 줄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와 콜로라도대학교 볼더 캠퍼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 등이 공동 수행한 이번 연구는 과학 저널 ‘네이처 신진대사(Nature Metabolism)’ 온라인판에 19일(현지 시각) 게재됐다.

● 체중만큼 먹고 초고속 대사…비단뱀의 놀라운 변화
비단뱀은 야생에서 20년 넘게 살 수 있다. 일부는 몸길이 5m·몸무게 100㎏ 이상 자랄 수 있다. 비단뱀은 체중과 맞먹는 먹이를 한 번에 먹은 후 극적인 생리 반응을 보여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비단뱀은 먹이를 먹은 지 몇 시간 만에 심장을 포함한 장기가 50% 이상 커지고, 소화 과정에서 에너지 요구량이 40% 이상 증가한다. 또 평소에는 분열하지 않던 췌장의 인슐린 분비 세포(베타 세포)도 급격히 증가한다. 버마 비단뱀의 경우 대사 속도가 최대 40배까지 증가한다.

연구진은 식사 전후 비단뱀의 혈액을 분석해 200여 가지 대사 물질이 32배 증가하고, 다른 24개는 같은 수준으로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중 하나는 1000배 이상 증가했는데, 바로 pTOS였다.

pTOS는 장내 미생물이 식이 아미노산 티로신을 분해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물질로, 사람은 주로 소변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능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연구진이 해당 물질을 쥐에 투여하자 에너지 소비와 장기 크기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식욕과 섭식 행동은 뚜렷하게 감소했다. 비만 쥐는 먹는 양이 줄었고, 28일 후 체중이 약 9% 감소했다.

GLP-1과 다른 작용…‘뇌 직접 조절’ 가능성
위고비 같은 GLP-1 계열 약물은 뇌의 식욕 조절과 위 배출 지연 등을 통해 포만감을 높이고 식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메스꺼움, 변비, 복통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pTOS는 시상하부(식욕 조절 중추)에 직접 작용하는 방식, 즉 GLP-1 계열 약물과 달리 위장 작용이 아닌 시상하부를 통한 경로로 식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인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식사 후 pTOS가 증가하긴 했지만, 증가 폭은 2~5배 수준에 그쳤다. 다만 일부 사람에게서는 25배 이상 증가해 비단뱀과 유사한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공동 교신저자인 콜로라도대 볼더 캠퍼스의 생물학자 레슬리 라인완드 교수는 “우리는 GLP-1 약물의 일부 부작용 없이 쥐에서 작용하는 식욕 억제 물질을 뱀에서 발견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파충류는 이미 인간에게 중요한 여러 약물의 개발 단서를 제공해 왔다. 뱀독에는 혈압약이나 항응고제로 개발된 다양한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다. 또한 세마글루타이드는 혈당을 조절하는 길라 몬스터(Gila monster·독 있는 대형 도마뱀)의 호르몬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됐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가능성은 충분
연구진은 이 결과를 실제 치료에 적용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pTOS가 인간에게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안전성 측면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연구진은 “비단뱀에서 먹이 섭취 후 다양한 장기에서 변화하는 수많은 분자를 확인했다”며 “이 중에는 호르몬처럼 작용하지만 기존에 알려진 어떤 호르몬과도 닮지 않은 물질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분자들은 고혈압 치료제나 항응고제처럼 임상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예를 들어 당뇨병 환자나 간 질환 환자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동 교신저자인 스탠퍼드 의대 병리학과 조나단 롱 교수는 “포유류는 생리적·대사적 범위가 비교적 좁다. 예를 들어 인간은 한 끼에 체중의 약 1~2% 정도를 먹고 하루 세 끼를 먹지만, 뱀은 매우 드물게 먹고 식사 후 생리 상태가 극적으로 변한다”며 “물론 인간은 뱀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동물을 연구하면 인간의 대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자나 경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극단적인 생리 환경이 새로운 치료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비단뱀의 독특한 식사 방식이 비만 치료의 새로운 방향을 여는 실마리가 될지 주목된다.

관련 논문 주소: https://dx.doi.org/10.1038/s42255-026-01485-0

박해식 기자 pisto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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