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임·방관 ‘오마카세 민주주의’… 日, 다카이치 시대엔 바뀔까[북리뷰]

신재우 기자 2026. 3. 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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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의 일본
이헌모 지음│생각의힘
자민당 파벌, 유사 정권교체효과
정치자금 대물림 세습의원 만연
잃어버린 30년에 폐색감 짙어져
비세습 서사로 총리된 다카이치
중의원 장악하며 국정동력 얻어
게티이미지뱅크

예상치 못한 이란·미국 전쟁의 위기 속,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또다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는 19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란 사태 안정화에 나선 미국을 지지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을 외교 시험대에 올렸다. 기습적인 중의원 해산 선언으로 자민당의 ‘316석 압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다카이치. 바야흐로 거칠 것 없는 ‘1인 독주 체제’가 완성된 지금, 브레이크 없는 일본 정치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 숨 가쁜 정국 속에서, ‘갈림길의 일본’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20년 이상 일본 중앙학원대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재일한국인 정치학자 이헌모는 철저한 ‘내부자’의 시선으로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두 가지를 제시한다. 바로 ‘오마카세 민주주의’와 ‘폐색감’이다. 유권자가 주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 셰프에게 메뉴를 일임하듯 정치인에게 방관해버리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30년간 이어진 장기 불황 속에서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답답함이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색감의 기원은 1980년대 버블경제의 정점과 붕괴지만 이를 지속시킨 것은 일본의 기형적인 ‘정치구조’에 있다. 1955년 창당 이래 자민당은 사실상 60년 이상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해왔다. 오랜 장기집권과 거듭된 실정에도 정권교체의 열망이 끓어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은 자민당 특유의 ‘유사 정권교체’와 만연한 ‘세습의원’ 구조를 지적한다. 자민당은 관료 중심의 ‘보수 본류’와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보수 방류(매파)’가 당내에 공존하며 오랜 기간 서로를 견제했다. 당내 파벌 간 권력 경쟁과 교체는 유권자에게 마치 정권이 교체된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켜 왔다.

더 심각한 것은 세습 구조다. 2024년 총선 결과, 전체 당선자의 20.7%가 세습 의원이었으며 자민당 당선자(191명)로 좁히면 그 비율은 무려 33.5%(64명)로 치솟는다. 이러한 ‘정치 귀족’의 탄생은 지역구의 후원회나 지명도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부의 대물림까지 합법화한 일본의 ‘정치자금법’을 꼬집는다. 일본에서는 선대의 정치자금을 후대가 이어받을 경우 증여세가 면제되는데, 개인이 정치단체에 연간 최대 2000만 엔까지 기부할 수 있는 제도를 악용하면 상속세 한 푼 내지 않고 막대한 자산을 고스란히 양도할 수 있다. 출발선부터 다른 세습 정치인들이 국회를 장악하면서 일본 정치의 역동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적 정체는 남과 다르면 배척당하는 ‘요코나라비(옆사람 따라하기)’, 눈치와 분위기로 개인을 억압하는 ‘구우키(공기)’ 등 일본 특유의 수직적 동조 압력 문화, 그리고 중간업자가 지배하는 경제 구조와 맞물려 거대한 ‘침묵의 요새’를 구축했다.

이처럼 고인물이 되어버린 일본 정치에 변화의 파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다카이치 사나에다. 그는 140년 일본 헌정사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지방대 교수 출신의 비세습 정치인이라는 서사로 산전수전의 역경을 뚫고 정상에 올랐다. 대중은 이 이례적인 아이콘에 열광했다. 다카이치는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 대신 SNS와 쇼트폼 콘텐츠를 무기 삼아 대중의 정서적 일체감을 자극했고, 이른바 ‘사나카쓰’라는 거대한 팬덤을 구축했다. 최근 연전연패하던 자민당에 사상 최대 의석을 안겨준 동력 역시 짙은 폐색감을 뚫고 나온 이 포퓰리즘적 이미지 정치의 승리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중의원 3분의 2 이상을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은 다카이치 정권은 2028년 참의원 선거까지 이렇다 할 견제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소수여당이라 일을 못 한다”며 해산선거를 감행했던 그가, 이제 부부 별성 금지, 스파이 방지법, 무기 수출 규제 완화 등 묵혀두었던 극우적 정책과 헌법개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저자의 예측이다. 대만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의 마찰 속에서 한국과의 우호 기조는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나, 우경화의 폭주가 어떤 변수를 낳을지는 미지수다.

맹목적인 ‘오마카세 민주주의’에서 출발해 갈림길에 선 일본. 그들의 선택이 결국 우리의 내일과도 직결돼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은 1985년 미국이 침체하는 제조업의 부흥을 위해 일본의 엔고를 강요한 플라자 합의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일본과의 상호관세를 조정하며 다시 한 번 방향 설정의 시기가 왔다. 일본이 갈림길 위에 있다. 세계가 갈림길 위에 있다. 520쪽, 2만4800원.

신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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