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터졌는데 금값은 급락… ‘방어막’ 대신 ‘현금인출기’ 된 안전자산
‘안전자산’인 금과 은 가격이 투자자들의 광범위한 현금화(Dash for cash) 수요에 밀려 동반 하락하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며 고금리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당장 현금이 필요한 투자자들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안전자산인 금과 은마저 팔아치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주요 항공 영공 폐쇄로 인한 실물 운송 마비와 기관 투자자들의 레버리지 축소 움직임마저 겹치며 귀금속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다.

◇고점 대비 주저앉은 금·은… “현금 확보 위한 1순위 매물로 전락”
20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19일 기준 국제 금 현물 종가는 온스당 4651.73달러로 마감했다. 금 가격은 지난 10일 이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락하고 있다. 은 현물 종가 역시 온스당 72.55달러를 기록하며 동반 약세를 보였다. 이는 이란 전쟁 발발 직후 금 가격이 한때 5400달러 선을 돌파하고 은이 93달러대까지 치솟았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꺾인 수치다. 통상 위기 상황에서는 금으로 자금이 몰리지만, 현재는 오히려 증시의 극심한 변동성 속에서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에 직면한 투자자들이 금과 은을 최우선으로 매각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외신들은 이를 전형적인 ‘유동성 확보’ 국면으로 분석한다. 폴 서게이 킹스우드 그룹 투자관리 부문 대표는 CNBC와 인터뷰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빠르게 처분할 수 있는 자산부터 팔아치우는 광범위한 매도세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 단계가 이제는 안전 자산을 매각해 다른 자산의 손실을 메우거나 현금을 조달하는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식 등 위험 자산에서 발생한 손실을 덮기 위해 수익이 나 있던 금을 현금인출기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항공로 폐쇄로 물류 마비돼 금 운송 비용 급등
지정학적 충격이 낳은 물리적 물류 차질과 금융 시장의 리스크 축소 움직임도 금값 하락을 부추기는 핵심 요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중동 분쟁 격화로 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영공이 폐쇄되면서 글로벌 금 물류의 핵심 허브인 두바이의 항공 운송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전했다.

금 실물은 보안상 주로 여객기의 화물칸을 통해 운송되는데, 주요 노선의 비행이 취소되고 보험료 등 운송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물리적 거래 자체가 가로막힌 상태다. 세계금협회의 존 리드 수석 시장 전략가는 “중동 지역 항공편 운항이 중단됨에 따라 실물 금 확보가 시장의 핵심 우려 사항으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실물 금 공급이 막히면 희소성이 부각돼 가격이 오르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재는 정반대의 급락 장세가 연출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금 시장이 금 관련 상장지수펀드(ETF)나 선물처럼 금융화된 ‘종이 금’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당장 유동성 압박을 받는 투자자들은 운송과 처분이 곤란한 실물 대신,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금 선물이나 상장지수펀드(ETF) 등 종이 금을 시장에 쏟아내며 가격을 끌어내리고 있다. 여기에 물류 마비로 인해 ‘결제 불이행’ 공포가 커지자 이 같은 투매를 더욱 자극하는 것도 금 값 하락요인이다. 싱가포르금시장협회(SBMA)는 시장 분석 리포트를 통해 “여객기 운항 축소로 스위스 등지에서 뉴욕으로 금을 제때 배달하는 것이 제한됐다”고 지적했다.
비행길이 막혀 약속한 만기일에 실물 금을 건네주지 못하면,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채무 불이행 사태를 맞을 수 있다. 이 같은 초유의 ‘배달 사고’를 우려한 투자은행과 거래자들이 아예 보유하고 있던 권리와 물량을 전부 팔아치우고 시장에서 발을 빼면서 연쇄 하락을 부추기는 형국이다.
이렇다 보니 금은 안전 자산이 아니라 언제든 내다 팔 수 있는 ‘급전 마련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캐나다 TD증권의 다니엘 갈리 원자재 전략가는 “기관 투자자들은 금을 필수 자산으로 많이 보유해 왔지만, 이제 그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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