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금상선은 이란 전쟁 전 중고 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 초대형유조선)를 대거 매입하였습니다. 유조선 운임 급등으로 돈방석에 앉게 생겼습니다.
해운업계에서는 "요즘 업계 사람들끼리 만나면 장금상선 이야기만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장금상선의 이번 VLCC 매입 방식이 이례적이고 매입 시점도 너무 절묘해 "전쟁을 미리 예측한 것 아니냐"는 농담 섞인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고 VLCC를 10척 매입한 국내 해운사가 또 있습니다. 하림그룹 계열사인 팬오션입니다. 장금상선과 달리 상장사여서 시장의 주목을 받을 법 하지만 주가 흐름을 보면 비교적 잠잠합니다. VLCC에서 대단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시장은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베팅에도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이슈체크에서는 '신의 한수'가 된 장금상선의 과감한 투자 이야기부터, 팬오션과 장금상선의 수익성에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봅니다.
■ 해운사는 선박을 어떻게 살까?
대형 해운사들은 조선사에 선박을 주문할 때 여러 척을 한번에 주문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 현금으로 충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죠.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해운사들은 보통 '선박금융'을 통해 매입합니다.
해운사는 먼저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합니다. 일종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것이죠. 한국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 등은 선박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SPC에 대여해줍니다. 동시에 선박투자회사가 펀드를 조성해 SPC에 자금을 넣어주기도 하고요. SPC는 조달한 자금을 조선사에 지급하고 선박을 인도받습니다.
SPC를 설립하는 이유는 뭘까요. 해운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SPC를 통해 선박 소유권을 분리하면 해운사가 파산하더라도 금융기관은 담보로 잡아둔 선박을 매각해 자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죠.
선박에 대한 법적인 소유권은 SPC에 있기 때문에 해운사는 SPC와 용선 계약을 맺습니다. 해운사는 선박 운용으로 벌어들인 운임의 일부를 용선료로 SPC에 지급합니다. SPC는 이 용선료로 선박금융 원리금을 갚아 나갑니다.
중고선박을 매입할 때도 선박금융을 많이 이용합니다. 조선사가 아니라 기존 선박 소유주에게 선박대금을 지급합니다. 중고선 금융을 해주는 금융기관은 선령(선박의 연령)을 중요하게 본다고 합니다.
업계 관계자는 "선박이 너무 노후화 돼있으면 운용이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박의 연령,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다"며 "고정적으로 물건을 싣는 화주가 누구인지 안정적인 화주를 확보하고 있는지도 따져본다"고 말했습니다.
■ 전쟁 직전 VLCC 싹쓸이한 장금상선
장금상선은 작년 말부터 이란 전쟁 직전까지 중고 VLCC 약 40척을 매입했습니다. 그 규모는 약 3~4조원으로 추정됩니다. 선박대금 전액을 일시불로 지급한 것은 아니겠지만 조 단위 자금을 단기간에 투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코로나19 직후부터 매입한 것을 감안하면 이 회사가 현재 보유한 VLCC는 100척 이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전쟁 직전 VLCC를 매입한 방식이 다소 이례적이라는 평가입니다. 다수의 해운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선박금융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사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현금이 많다면 선박 금융을 이용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장금상선의 보유 현금(약 2조원)을 고려하면 자체 현금을 모두 쏟아부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장금상선이 어떻게 선박을 매입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해운업계, 금융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세계 1위 컨테이너사 MSC가 장금상선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줬을 것으로 봅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장금상선이 산은, 수출입은행의 선박금융을 받지 않고 MSC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올해 초부터 계속 돌고 있었다"며 "어떤 방식으로 지원해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MSC도 해운사인데 왜 직접 VLCC를 매입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MSC가 컨테이너선사이다보니 직접 원유운반 시장에 뛰어들긴 어렵다"이라며 "장금상선 오너와 MSC 간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MSC가) 측면 지원해주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MSC는 장금상선에 자금을 대여해주면서 발생한 이자 외에도 선박 매각 차익을 노렸을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장금상선이 향후 중고선박을 매각하면 선박 차익의 일부를 가져가도록 계약 구조를 짰을 것이란 추측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장금상선과 MSC의 예상은 적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원유운임료는 천정부지로 솟는 중이죠. 중동 노선의 단기 원유 운임 지수를 나타내는 BDTI TD3C는 지난 17일 기준 480포인트로 연초 대비 9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중고선 몸값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년차 기준 VLCC 중고선가는 현재 1억4000만달러로 연초 대비 16% 상승했습니다. 단기 운임료가 크게 상승하면서 중고선가가 신조선가보다 더 비싼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 비슷한 시기에 베팅…장금과 팬오션, 수익성 갈린 이유
하림그룹의 계열사이자 벌크선 사업을 주력해오던 팬오션도 비슷한 시기에 원유운반선에 베팅했습니다. 지난 2월 SK해운이 보유한 VLCC 10척과 관련 사업부를 총 9737억원에 인수했습니다. 원유 운임이 크게 뛴 만큼 회사의 주가도 함께 움직일 법 하지만 예상외로 주가는 큰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 원인을 알기 위해선 해운사가 화주들과 맺는 계약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운사와 화주 간 계약 방식은 크게 단기운임과 장기운임으로 나뉩니다. 단기운임은 화주가 물건을 실을 때마다 운임료가 책정됩니다. 시황에 따라 운임료가 천차만별입니다.
장기운임은 계약 기간을 정하고 운임료를 책정합는 방식입니다. 계약 기간은 선종마다 조금씩 다르나 원유운반선은 보통 5~10년 단위로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운임료는 물가상승률, 연료비 등 비용 인상분만 운임에 반영됩니다. 운임 시장이 호황일 때 큰 돈을 벌진 못하더라도 항시 안정적인 수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원유운반선은 장기 운송 계약 비중이 높은 선종입니다. 원유운반선의 화주인 정유사가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팬오션이 이번에 인수한 SK해운의 VLCC 역시 장기 운송 선박입니다. 지금처럼 운임이 크게 올라도 수익성을 만끽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반면 장금상선이 이번에 매입한 VLCC는 장기 용선 계약이 끝나거나 조만간 끝나는 선박들입니다. 이번에 매입한 선종 선령이 10~15년 차인 것을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전 세계 운항 중인 VLCC는 700~800척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장금상선의 점유율은 12~13% 남짓으로 영향력이 크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단기운임시장만 보면 장금상선의 존재감은 남달라집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원유단기운임 시장에서 장금상선의 점유율은 40%로 추정된다"며 "이란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장금상선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