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파병 압박, 일본은 돈으로 막았다… 다카이치, 109조 규모 2차 대미투자 합의
화기애애 연출 뒤 日총리 부담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19일(현지시간) 백악관으로 초청해 호르무즈해협 경색 해소를 위한 자국 주도 군사 작전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수용하는 대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전후(戰後) 에너지 안보 기여 방안을 제시했다.
트럼프의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 마련한 다카이치 총리와의 공개 회담 자리에서 대(對)이란 전쟁과 관련해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step up) 기대한다”고 답했다. 그는 “일본에는 4만5,0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우리는 일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며 “그런 관계인 만큼 일본이 나서 주리라 기대하고 그들이 나서더라도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석유의 90% 이상을 그 해협을 통해 들여온다고 들었다. 그것이 나서야 할 큰 이유”라고도 했다. 다만 군함 파병 같은 구체적인 지원 방식을 언급하지 않고, ‘나서야 한다’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해 수위를 조절했다.
일본의 지원 수준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는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아 왔다. 어제와 그제 우리에게 전달된 메시지를 보면 일본은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파병 거부 입장이 분명한 서방 안보 동맹체와 달리 일본은 미국 요구에 호응할 여지가 있다는 기대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일본 기여를 끌어내려는 압박 성격도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관심사는 무역이다. 그는 “오늘 일본과 좋은 논의를 할 것이고 대부분은 무역에 대한 것”이라며 “일본은 우리 에너지와 원유, 가스의 엄청난 구매자이고 특히 알래스카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다카이치의 회피
다카이치 총리는 압박을 회피하되 트럼프 대통령이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애썼다. 모두발언을 통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중동 정세를 거론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당신만이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고 아첨했다. 이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며 “일본은 이란이 인접 지역을 공격하고 호르무즈해협을 사실상 봉쇄한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란전을 둘러싸고 국내외 비판에 직면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외교적으로 확실히 힘을 실어 준 것이다.
더불어 그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과 일본이 함께 강하고 풍요로워지기 위한 대화를 하고자 한다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구체적 제안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안보와 핵심 광물, 에너지 협력 등에 관한 논의를 트럼프 대통령과 하려 한다고도 했다.
실제 두 정상은 회담에서 일본의 2차 대미(對美) 투자 프로젝트, 에너지 및 핵심 광물 협력 확대 방안 등을 논의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회담 뒤 취재진에 “우리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을 포함한 전략적 투자 이니셔티브의 2차 프로젝트를 발표했다”고 말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해당 프로젝트의 사업 규모가 총 730억 달러(약 109조 원)로, 지난달 발표된 1차 프로젝트 규모(360억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고 보도했다. 양국은 공동 문서에서 2차 투자 프로젝트와 관련해 “발전을 계속하는 새로운 미일 동맹 황금 시대로의 길을 개척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울러 미국에서 조달한 원유를 비축하기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고 싶다는 일본 측의 의사가 전달됐고, 일본 혼슈 남쪽 태평양 미나미토리시마 인근 해역 해저 광물 자원 개발 협력 등 양국이 참여하는 핵심 광물 관련 프로젝트들이 확정됐다고 다카이치 총리는 전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바라는 것은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구를 무사히 물리치는 것이다. 집무실 공개 회담에서 이에 대해 즉답하지 않은 그는 비공개 회담 뒤 취재진과 만나 “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와 취할 수 없는 조치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 상세하고 철저하게 설명했다”고 소개했다. 파병과 관련한 ‘평화 헌법’ 체제하에 일본의 법률적 제약이 언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카메라 뒤의 현실
이날 회담은 호르무즈해협 군함 파병을 요구받은 미국 동맹국 정상 중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대면하는 자리였다. 미일 간의 불편한 과거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계기가 된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무례하게 언급한 것 말고는 트럼프 대통령도 다카이치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개 석상에서 연출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지난달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를 앞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이 다카이치 총리와 집권 자민당을 공개 지지한 사실을 거듭 부각한 트럼프 대통령은 “방금 엄청난 선거에서 이기고 기록적 승리를 거둔 아주 특별한 분을 모시게 됐다”고 말했다. “매우 인기 있고 강력하고 대단한 여성”이라며 다카이치 총리를 치켜세웠다. ‘강한 일본’을 정권 목표로 삼은 다카이치 총리는 백악관 만찬에서 “재팬 이즈 백(Japan is back·일본이 돌아왔다)”을 외치기도 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개인적 친분을 십분 활용하려는 모습이었다. 백악관 SNS 담당인 마고 마틴 언론보좌관이 엑스(X)에 게시한 짧은 동영상에는 백악관에 도착해 차량에서 내린 다카이치 총리가 악수하려 손을 내민 트럼프 대통령에게 와락 안기는 장면이 담겼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가 느끼는 부담감은 상당했으리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파병 요청 외에도 △주일미군의 중동 차출 △무역법 301조 조사에 이은 추가 관세 부과 위협 △조속 투자 요구 등 압박 요인이 적지 않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대니 러셀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미 싱크탱크) 석학 연구원은 언론에 배포한 성명에서 “트럼프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 안보를 희생시킬 것이라는 다카이치 총리의 우려는 중동 사태가 인도·태평양에 제공될 미국의 관심과 자원을 분산시킬 것이라는 염려로 대체됐다”고 분석했다. 또 “카메라 뒤 현실은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양보를 얻어 내려는 트럼프의 욕구가 끝이 없으며 일본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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