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경계의 사람들]

샌프란시스코·김인정 2026. 3. 2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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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개월 사이 미국에서는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 약 1400명이 추방된 것으로 추산된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을 도왔던 몽족 난민 출신 이민자마저 추방되고 있다.

※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일부 인물은 신변 안전을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안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속도가 느린 곳이다. 메콩강에서 습기가 올라오는 아침이면 주황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조용히 사원 경내를 거닌다. 거리에선 스쿠터와 삼륜 택시 툭툭이 오간다. 사람들이 건네는 라오어는 부드러운 음악처럼 들릴 뿐, 홀로 선 투의 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흘러내린다. 투에게 라오스는 지금껏 디뎌본 적 없던 땅이다. 시민도 아니다. 연고도 없다. 부모의 나라였지만 부모가 등 돌린 국가이기도 하다. ‘배신자’의 후손을 라오스가 죽이거나 감금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2025년 3월, 미국에서 라오스로 추방된 투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스무 시간 비행 끝에 왓타이 공항에 내리자 라오스 군인 10명 정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투와 그의 가족은 미국에 재정착한 몽족 난민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몽족 지도자였던 방파오 장군의 비밀 부대에서 미국 CIA를 긴밀히 도와 라오스 공산 반군과 싸웠다. 가족은 사이공이 함락되자 공산주의 정부의 보복과 박해를 피해 메콩강을 건너 국경을 넘었다. 투는 타이 난민캠프에서 태어났다. 어디서도 시민이 되지 못했다. 가족은 투가 두 살이 되던 해 다른 몽족 난민들과 더불어 미국에 재정착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동맹군과 그들의 가족 등 몽족 난민 약 15만명을 수용했다. 이들을 분산배치하고 조기 자립시키는 게 목표였지만, 실제 정착은 저렴한 주거와 저임금 일자리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난민 인구가 저소득층 거주지역에 집중됐다. 1990년 당시 미국 내 몽족 가구의 빈곤율은 64%에 달했다. 투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족 전통 의상을 입은 한 어린이가 2021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은 미군을 도운 몽족을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AP Photo

고산지대 화전민으로 농작물을 기르며 살아온 부모들은 미국의 낯선 제도와 언어장벽에 부딪혔다. 때로는 자녀에게 영어 통역을 의존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 내 위계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다. 난민 정착 프로그램으로 그 어려움을 해소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전쟁 트라우마 치료 역시 극히 제한적으로만 제공됐다. 투의 세대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 적잖이 불화했다. 특히 몽족 청소년들이 학교나 지역사회에서 괴롭힘이나 인종 간 갈등의 대상이 됐다. 몽족 부모들은 참고 견디라고만 했다.

투의 기억으론, 당시 캘리포니아 스톡턴 지역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몽족 소년 절반은 갱단에 가입해 있었다. 투는 성품이 온화한 소년이었다. 갱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학교 안팎에 이미 만연해 있던 폭력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어쩌다 휘말려 갱이 쏜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순간, 투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바뀌었다. 생존을 위해 갱단에 가입하기로 했다. 자기 보호와 반항심리가 뒤섞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의 어리석은 사고방식이었지만 당시엔 그 길밖엔 없어 보였다.

갱단은 난민 아이들에게 가족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한 유대감을 주었다. 투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갱단 멤버들과 자동차를 훔치는 등 갱단에 충성했다. 스스로도 이러다 감옥에 갈 것 같다며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주에 실패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붙잡혔을 때, 투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투는 28년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린 시절 저지른 일은 감옥에서 죗값을 다 치르고 나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엔티안의 시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엉거주춤 서 있노라면, 열여섯 살의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발목 잡힌 기분이다.

라오스의 임대아파트에 홀로 누워 있을 때면 열여섯 살에 헤어진 가족과 중년이 되어서야 재회해 함께 살던 시간이 거짓말 같다. 고속도로 청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의 집 현관문을 열면 다진 고기에 라임과 허브, 고춧가루를 섞어 만든 매콤한 라브 샐러드 냄새와 레몬그라스를 듬뿍 넣은 진한 닭죽의 향이 확 풍기곤 했다. 어머니는 투에게 밥을 차려줄 수 없었던 세월이 아쉬운 듯 고슬고슬한 찹쌀밥을 곁들인 따뜻한 몽족 전통 요리를 끊이지 않게 준비해두었다. 이미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는 투에게, 부모님은 식사할 때마다 이것저것 더 먹어보라며 아이 대하듯 채근했다. 주말이면 조카들이 놀러 와서 팔에 매달렸다. 몽족답게 대가족이라 집에 돌아와 보니 9남매에게서 뻗어나온 조카가 이미 넷이었다.

투는 워낙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여덟 살 조카 사라와 각별했다. “왜 감옥에 갔어요?”라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맹랑하게 물어오는 사라를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영민한 사라를 옆에 앉혀두고 ‘곰 세 마리’ 같은 동화책을 함께 읽었다. 조카가 맞춤법을 괴발개발 틀린 귀여운 문자를 보내오면 투는 웃으며 고쳐주었다. 비록 현재 라오스에선 라오어를 한마디도 몰라 입을 닫는 신세지만, 미국에서 투는 언어를 좋아했고 영어를 곧잘 가르쳤다. 이 비밀 수업에 대해 몰랐던 사라의 엄마는, 아이의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이렇게나 늘었는지 어리둥절해했다. 그 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빈 천장을 스크린 삼아, 투는 짧았던 행복을 끈질기게 재생해본다. 감옥에서 나와 어떻게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헤매던 때 삶의 목적이 되어준 조카들에게 “나는 이제 다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단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이유는 트럼프에게 물어라”

투는 자신이 라오스로 보내질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2025년 2월의 아침, 모든 게 바뀌었다. 오전 10시쯤 부모님이 낚시를 가고 투는 새크라멘토 집에 남아 있었다. 휴일이라 한 주간 고속도로 청소 일로 노곤해진 몸을 한가롭게 소파에 누이려던 차였다. 누군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문구멍을 통해 밖을 보니 경찰특공대처럼 검은 조끼를 입은 커다란 사람들이 서 있었다. 투는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경찰인가 싶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최악의 공포’였다. 협조하지 않아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다급히 문을 열었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어안이 벙벙해 있는 투를 추운 바깥으로 거칠게 끌어내 수갑을 채웠다. 티셔츠에 반바지 바람으로 끌려나온 투가 도망갈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밝혔지만 막무가내였다.

출소 당시 ICE 구금 시설로 인계됐을 때 이민법원 판사는 분명히 “항소를 포기하고 추방 명령을 받으면 영주권을 상실하지만, 라오스가 당신을 받아줄 일은 어차피 없으니 송환되지 않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변호사도, 라오스 대사관도 투에게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고작 1년 반이 흐른 뒤, ICE가 찾아와 “라오스가 당신을 받기로 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길로 구금 시설에 갇힌 투는 ICE 요원 두 명에게 붙들려 한 달 뒤 라오스행 비행기에 태워졌다. 공항에서 임시 거처인 공안 시설로 옮겨지는 중에 만난 라오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아 당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투에게 설명했다.

투는 이 대규모 추방 작전에서 초기에 추방된 몽족 중 한 명이라 그 진행 과정을 자세히 지켜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추방자들이 한 명씩 민항기에 태워져 닷새에 한 번꼴로 조용히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는 ICE 전세기에 태워져 단체로 오기 시작했다. 미국과 공식적인 송환 협정을 맺지 않고 추방자를 받지 않던 라오스가,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압박으로 돌연 추방자들을 받은 것이었다. ICE에 갑자기 잡혀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친구, 친척, 이웃들이 불안해하며 먼저 추방된 투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통에 하루종일 휴대전화가 쉴 틈이 없다. 미군에 협력했던 과거가 있는 몽족 커뮤니티에선 이런 추방 조치가 ‘배신’ 아니냐는 불만과 반발도 나온다.

2025년 10월21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시설의 모습. ⓒAP Photo

갑작스러운 집단 추방은 미국 내 제일 큰 난민 디아스포라 중 하나인 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 이주민 집단이 광범위하게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들 중 약 1만5000명이 최종 추방 명령을 받고 송환되지 않은 채로 미국에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국가들이 추방자를 받지 않으면 추방이 유예된 채, 매년 ICE에 정기 보고를 하는 것으로 풀려나 미국에 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취업해서 새 삶을 일구고, 가족을 꾸리고, 지역사회에 뿌리내렸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2기가 시작된 후 전례 없이 추방 집행을 강화했다. 특히 과거 유죄판결이 있다면 대규모 추방의 쉬운 표적이 됐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헤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11개월 사이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 약 1400명이 추방된 걸로 추산된다.

그건 투의 친구인 낼리의 가족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낼리의 남편 블롱도 최근 ICE에 갑자기 잡혀갔다. 지난 1월16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는 블롱을 언제나처럼 낼리가 차로 데려다주던 참이었다. 병원 도착까지 고작 5분쯤 남은 시점에서 다른 차에게 추격당하고 있다는 걸 낼리가 눈치챘다. 낼리는 백미러를 예의 주시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운전을 이어갔다. 비상 경광등이 번쩍이는 차였다.

블롱은 낼리가 혹시 신호위반을 해서 경찰이 따라온 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낼리는 신호위반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저건 경찰차가 아닌 것 같아. ICE의 차일지도 모르겠어.” 낼리는 조용히 그렇게 말하곤 붐비지 않는 도로에 차를 세웠다. ICE가 미네소타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뒤로 마음 졸이며 걱정해온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곧장 열두 대 정도 되는 차량이 그들의 차를 에워쌌다. 수많은 요원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려 그들의 차로 다가왔다. 블롱이 병원에 가는 길이라며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차창을 전부 부숴버리기 전에 신분증부터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내 ICE 요원들은 블롱의 젊은 시절 사진을 품에서 꺼내 대조해보더니,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내 가족을 찢어놓고 있다, 왜 이러는 거냐”라고 블롱이 묻자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물어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낼리는 늘 블롱이 그저 자신보다 조금 운이 없었던 쪽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미국으로 이주한 몽족 난민 부모를 두었지만 낼리가 간신히 가진 몇 가지를 블롱은 가지지 못했다. 낼리의 부모는 미국으로 일찌감치 이주하는 데 성공했고, 낼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얻었다. 블롱의 가족은 모든 게 조금씩 늦었다. 블롱의 부모도 박해를 피해 라오스에서 도망쳤지만 훨씬 오래 타이 난민캠프에 머물렀다. 블롱은 난민캠프 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이 다 되어서야 미국에 재정착할 수 있었다. 새로운 나라의 낯선 언어와 질서는 난민 가족을 쉽게 무지함으로 밀어넣었다. 난민 가족에게 흔한 비극이었다.

블롱의 부모는 미국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가족은 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블롱의 아버지는 훈육을 한다며 어린 블롱을 때리거나 집에서 자주 쫓아냈다.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블롱이 10대에 범죄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가게 됐을 때, 블롱의 부모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어떻게 아들을 보호해야 할지도 몰랐다. 블롱은 감옥에 갔다. 혐의 일부는 부실한 수사로 조작된 것이라 프로 보노(전문가의 재능 기부) 변호사의 도움으로 판결이 뒤늦게 취소됐다. 10년이 넘는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투와 같은 과정을 거쳐 추방 명령을 받고 블롱은 영주권을 상실했다.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블롱과 만나던 무렵, 이 모든 상황을 먼저 솔직히 털어놓는 블롱에게 낼리는 호감과 진실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 시절 몽족 난민 아이들이 ‘아시안 갱’이라며 쉽게 수사의 표적이 되곤 했다는 걸 낼리는 알고 있었다. 둘은 곧 어디든 함께하게 됐다. 미네소타에서 몽족 전통 혼례도 올렸다. 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몽족의 문화에 따라, 신부의 혼이 신랑의 집안으로 옮겨 간다는 의미로 낼리가 문지방을 조심스레 넘고선 손목에 흰 실을 감는 예식이었다. 블롱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취직해서 근면하게 일하며 돈을 모아 집도 샀다. 아이들이 연달아 태어났다.

2024년 블롱과 낼리(왼쪽 두 번째)는 두 살 때부터 백혈병을 앓아온 막내딸의 완치를 기념하며 가족사진을 찍었다. ⓒ낼리 제공

블롱은 아버지의 양육방식을 대물림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끊임없이 안아줬다. 함께 영화를 보거나 옷을 골라주었다. 백혈병을 앓는 막내딸이 항암 치료를 받으며 통증을 견디고 있을 때조차도 블롱은 그애를 웃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 공간을 부드럽게 꽉 채우는 듯한 블롱의 존재감을 모두가 사랑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잃을 수 없었기에 블롱은 ICE에 1년에 한 번 정기 보고 하는 날을 칼같이 지켰다. 교통법규 하나 어기지 않으려 했다. 세금도 꼬박꼬박 냈다. ICE가 미네소타를 들쑤시고 다니는 걸 보면 더럭 겁이 났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믿지 않았다. 11년간 문제 없이 지켜온 가족의 행복이 15년간 유예된 추방 명령으로 정말로 깨질 거라곤.

요즘 낼리는 친구 투가 라오스에서 지내는 삶을 보며 블롱의 위태로운 앞날을 가늠해보곤 한다. 블롱은 ICE에 끌려가기 전, 낼리에게 매달려 울면서 속삭였다. “내가 너랑 결혼해서 널 이런 상황에 끌어들이게 됐어. 이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아이들을 다 데리고 혼자 남게 될 수도 있어. 정말 사랑하고 정말 미안해.” 블롱은 한쪽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ICE는 그에게 수갑을 채워 미네소타 구금 시설로 끌고 갔다. ICE 정기 보고를 놓치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 적어둔 날짜를 두 달 남겨두고서였다. 아빠를 잃은 가족은 기묘한 침묵에 잠겼다. 여덟 살 된 어린 아들만이 아빠가 어디에 갔는지 자주 물었다. 아이의 질문 역시 곧 멈췄다. 목격자가 엄마에게 건넨, 아빠가 잡혀가는 영상을 우연히 본 뒤론 밤마다 끝없이 운다.

추방자가 추방자에게 건네는 작은 꾸러미

2023년 9월, 28년 만에 투가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던 날.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의 ICE 구금 시설 앞에서 투는 몇 가지 다짐을 했다. 이미 밤이라 한층 서늘해진 가을 공기가 몸속 깊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자유와 기대로 달궈진 몸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역으로 이동해 집으로 돌아가는 암트랙 열차 표를 사는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솔레다드 교도소 운동장에서 영어가 서툰 재소자들을 모아두고 매주 영어 수업을 열어 가르치던 날들이 자꾸 떠올랐다. 투는 집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이런 말들을 작게 읊조렸다. 나는 이미 교도소 안에서 타인을 돕는 여정을 시작했다, 분명히 이런 봉사를 바깥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 거다, 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내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세상에 좋은 일을 꼭 해내고 말 것이다···.

라오스로 추방당해 다시 오도카니 혼자가 된 뒤, 투는 그날의 다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라오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추방자들이 전세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우왕좌왕하는 걸 손 놓고 보고만 있기 안타까웠다. 자기가 이미 겪어본 일이니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투는 다른 초기 추방자와 의기투합해서 작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다른 추방자들의 안전망이 되기로 했다. 추방자들이 말 그대로 맨몸으로 온다는 걸 투는 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세안제와 샴푸, 가벼운 옷처럼 당장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담긴 조그만 꾸러미를 만들어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열심히 손으로 포장한 서바이벌 꾸러미를 선물처럼 건넨다. 스쿠터가 주요 교통수단인 비엔티안에 얼른 적응하도록 스쿠터 타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머물 곳을 찾기 어려워하면 일단 집에서 재우고, 시민권을 따는 데 필요한 현지 보증인을 구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연고가 없는 추방자들에게 보증인 찾기가 요원한 일이란 걸 알아서다.

투는 2025년 라오스에서 비영리단체를 조직했다. 미국에서 라오스로 송환된 추방자들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준비한다. 세안 도구와 휴지 등으로 작은 꾸러미를 만들어 ICE 전세기에서 막 내린 집단 추방자들에게 전달한다. ⓒ투 제공

추방자의 가족들은 투를 ‘구원자’라 부른다. 추방된 가족을 위해 미국에서 뭘 보내주면 좋은지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투의 역할이다. 낼리처럼 가족이 ICE에 잡혀간 사람들도 추방 이후의 삶에 대해 투에게 물어오곤 한다. 투가 그들을 돕지만, 그들도 투를 돕는다. 투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다. 가족과 강제 분리돼 그 괴로움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망가져가는 추방자들을 보는 게 가장 가슴 아프다. 언젠가 직업훈련이 포함된 임시 거주 시설을 세우고 싶다. 자신이 간절히 찾아 헤맸던 ‘살아갈 이유’를 다른 추방자들에게도 줄 수 있길 투는 바란다.

라오스에서 투가 처음 맛본 음식은 ‘카오 삐약 카오.’ 걸죽하게 끓인 쌀죽이었다. 그 뒤로 여유가 있을 때면 라오스의 새로운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몽족 음식이 그리워지곤 한다. 만날 수 없게 된 가족과 돌아갈 수 없는 미국을 떠올릴 때면, 투는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밤에 대해 회상한다. 그 9월의 가을, 밤 기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28년 만에 스톡턴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와 형제, 처음 만난 조카까지 30여 명이 정류장에 모여 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의 손에는 그동안 형제들이 보내준 조카의 사진이 가득 담긴 작은 가방 하나가 소중히 들려 있었다. 만난 적도 없는 아이들을 내내 그리워했다는 걸 그애들은 알았을까? “안녕, 내가 너희 삼촌이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멋쩍게 말하는 투를, 아이들이 달려들어 와락 안아주었다. 그 밤, 누구 한 명 잠드는 사람 없이 밤새 웃고 떠들었다. 받아들여질지 확신하지 못할 때 거리낌없이 다가와 끌어안아주던 그 환영의 기억을 다른 추방자들에게 건넬 수 있을까? 투는, 그렇게 하고 싶다.

샌프란시스코·김인정 (논픽션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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