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 속 ‘침묵의 축제’ 된 무슬림 최대 명절

서보범 기자 2026. 3. 20.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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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라마단 종료 후 잔치’ 실종
이란, 최고지도자 사망 집단 추모
쿠웨이트, 콘서트·결혼식 금지령
UAE, 야외 공동 기도 제한 조치
이슬람교 단식 기간 라마단 종료(이드 알피트르)를 약 일주일 앞둔 지난 12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한 전통 시장에서 시민들이 남성 전통 복장을 둘러보고 있다. 미군 거점을 겨냥한 이란의 중동 주변국에 대한 공습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 최대 명절인 이드 알피트르를 맞게 됐다. /AFP 연합뉴스

“명절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필리핀을 방문하려고 항공편을 예매하는데 결항과 취소가 반복됐어요. 가까스로 필리핀 귀국편을 구하긴 했지만 카타르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카타르에서 일하는 필리핀인 크리스 루망글라스(39)는 최근 본지 통화에서 이슬람권 최대 명절 ‘이드 알피트르’를 앞둔 현지 분위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과 이란의 전방위 보복으로 중동 전역이 사실상 전시 상황에 들어가면서 이례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명절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에 거주하는 요르단인 하심 알다으자(28)도 본지에 “원래 이맘때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는데, 올해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훨씬 침체된 느낌”이라고 했다.

이슬람교 단식 기간 라마단을 마무리하는 축제 이드 알피트르는 무슬림의 최대 명절로 꼽힌다. 그러나 각국이 보안을 강화하고 이동에도 차질이 생기면서 올해는 축제 분위기가 크게 위축됐다. “명절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침묵·추모… 어두운 명절 분위기

지난 14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한 모스크에서 해가 저문 뒤 하루 동안의 라마단 금식을 마치는 이프타르 행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라마단과 이드 알피트르는 수니파·시아파 등 종파를 막론하고 전 세계 무슬림에게 연중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라마단 기간에 금식·금욕을 실천하고, 이를 마무리하는 이드 알피트르가 시작되면 가족 모임, 자선·축하 행사, 대규모 식사와 공동 기도 등 시간을 갖는다. 초승달이 관측되는 시점을 종료 기준으로 삼는 라마단은 올해 국가별로 19~21일 끝난다.

19일 알자지라·걸프뉴스 등 외신을 종합하면 이드 알피트르를 앞두고 이슬람 국가들의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쿠웨이트 내무부는 콘서트·연극·결혼식 등 대규모 행사와 실외 스피커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 UAE는 야외 공동 기도를 제한·축소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선 이란의 미사일·드론 공격으로 큰 폭발음이 계속되고 있고, 위협을 경고하는 휴대전화 알림이 처음으로 전송되기도 했다. 중동이 근래 최대의 안보 위기에 처하며 나타난 풍경이다.

이런 침체된 분위기는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감지된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사망에 따른 집단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걸프뉴스에 따르면,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의 시아파 공동체는 하메네이 사망 이후 새 옷을 입거나 명절을 기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배만 드리는 ‘침묵의 이드’를 선언했다고 전해졌다. 인도는 이란, 이라크 등과 함께 세계에서 시아파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지난 18일 파키스탄 카라치의 한 기차역에서 이슬람 최대 명절 이드 알피트르를 앞두고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한 아이들이 플랫폼에 남은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전쟁 여파로 항공편이 줄고 항공권 가격이 급등하면서 가족과의 만남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UAE 두바이, 카타르 도하 등 주요 허브 공항이 타격을 입으며 좌석이 부족해졌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유가가 폭등하면서 항공료 부담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던 이들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며 “명절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종파 간 분열 움직임도

이드 알피트르를 앞두고 종파 간 분열 움직임도 경색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는 19일 이슬람권 12국 긴급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장관들은 회의 후 발표한 이란 규탄 공동 성명에서 ‘이란’을 아홉 차례나 언급하면서 이란의 주변국 공격에 대해 ‘악랄하다(heinous)’며 비판했다. 이날 회의와 공동성명에는 이슬람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를 비롯해 튀르키예·이집트·파키스탄 등 중동과 남아시아의 수니파 군사 강국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평화와 안정 지원을 위한 협의”라는 사우디 측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 최대 명절을 코앞에 두고 수니파와 시아파 패권국 간의 분열 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사우디 외무장관인 파이살 빈 파르한 왕자는 “우리는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군사적 조치를 할 권리를 갖고 있다”며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그 파트너들은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우리가 보여준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라마단 시작 둘째 날인 지난달 20일 이집트 카이로의 한 모스크 위로 초승달이 떠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로, 초승달 관측을 기준으로 시작해 약 29~30일간 이어진다. 이후 다시 초승달이 관측되면 라마단이 종료되고 다음 날부터 이드 알피트르가 시작된다. 라마단 시작과 종료일은 국가마다 차이가 있다. /신화 연합뉴스

☞이드 알피트르(eid al-fitr)

아랍어로 단식(斷食)을 깨는 축제라는 뜻. 이슬람교 신자의 의무적 단식 기간인 라마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축하하는 명절이다. 이때를 기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외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거 귀향길에 올라 한국의 추석·설날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대다수 이슬람권 국가들이 공휴일로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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