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신념, 평생의 삶에서 지켜낸 실천적 지식인”

지난 7일 별세…전 경남대 교수
‘긴급조치 9호’로 1년6개월 실형
5공 땐 경남대 앞에서 서점 열어
노동 등 사회과학 책·자료 유통
경제구조 불평등 문제 깊이 고민
부마항쟁과 3·15의거 기념사업
창원국제민주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지난 8일 이른 아침에 전해 들은 서익진(1956~2026·3·7) 교수님의 전날 밤 별세 소식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7일 저녁, 교수님은 부마민주항쟁기념관 건립을 위한 토론회에 다녀온 나에게 마산과 부산의 협의 방향과 건립추진에 대해 조언을 건네셨다. 곧 있을 따님의 결혼 소식과 함께. 이른 봄, 마른 가지 끝에 돋아난 힘찬 새싹들에 시선이 머물렀다.
문득, 창원국제민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서 교수님께서 10월 말 마산 앞바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야외 상영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기시던 그 부지런함과 책임감이 다시 떠올랐다.
민주주의는 결코 저절로 주어진 적이 없다. 누군가의 결단과 저항, 그리고 오랜 시간의 희생 위에서 비로소 쟁취된 것이다. 그 길 위에는 이름이 남겨진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 경계 어디쯤에서 묵묵히 그 시대의 책임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 서익진 교수는 바로 그런 이름이다.
그는 젊은 시절, 유신체제의 억압이 일상을 짓누르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했다. 반유신 반독재 유인물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1년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사상과 양심을 처벌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 감옥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시험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통과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단단히 다져갔다.
출소 이후에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출판 활동을 통해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왔고, 5공 정권 시기 노동과 현실을 말하는 글과 자료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서 교수는 1982~88년 경남대 앞에서 ‘대학서림’을 운영했고 청운출판사도 세웠다. 그 과정은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어지는 실천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일관된 문제의식이다. 그는 2021년부터 5년 동안 화폐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서 교수는 화폐의 공공성과 경제구조의 불평등을 깊이 고민하며, 민주주의가 정치적 권리의 확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삶의 조건이 민주적이지 않다면 정치적 민주주의 역시 온전할 수 없다는 통찰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마주하고 있는 과제이다.
그의 학문적 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경남대 교수(경제학)로서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민주주의의 의미를 묻고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특히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그의 삶과 맞닿아 있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2000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활동을 했고 2018년부터는 3·15의거기념사업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부마민주항쟁은 반유신, 반군사 독재를 외치며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낸 시민혁명이다. 그러나 그 역사 역시 끊임없이 불러내고 해석하며 계승하지 않는다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서 교수는 바로 그 기억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해왔다. 학자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엄혹한 군사독재의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으로서 그는 민주주의의 현재를 과거와 이어왔다.
우리는 종종 민주화운동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소비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선택을 했던 순간들의 축적이다. 서익진 교수 역시 그러했다. 그는 자신을 영웅적인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시대 속에서 해야 할 일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끝까지 이어갔을 뿐이다.
그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단지 한 개인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여전히 누군가의 용기와 실천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과, 그리고 서 교수와 같은 이들의 삶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발자취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서익진이라는 이름은 거창한 수식 없이도 깊은 울림을 준다.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신념을 지켰던 한 사람, 그리고 그 신념을 삶으로 이어낸 한 사람. 그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현재의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 위에, 서익진이라는 실천가의 이름이 또 하나의 길로 남아 있다.
이창곤/(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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