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광주 면앙로의 주인공, 면앙정 송순 [도로명속 남도 역사인물]

광주광역시 북구에 '면앙로'가 있다. 면앙롱의 주인공 면앙정 송순은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된 평생 정치가였지만, 시가 문학의 대가로 더 유명한 분이다.
면앙로는 전남대학교 공과대학 쪽 담벼락에 맞닿아 있는 우치로에서 시작, 동문대로를 지나 두암동의 월동로와 만난다. 면앙로 주변에는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문흥초, 무등초, 문화중학교가 있고, 무등도서관이 있다. 총 길이 2.6킬로미터로, 왕복 4차선 도로다.
#77세에 의정부 우참찬
면앙로의 주인공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3)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문학의 대가다. 그는 국문 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등 단가(시조) 20여 수,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 등 500수가 넘는 한시를 지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러나 송순은 시인이기 이전에 50여 년을 관직에 몸담은 관료였다. 조광조가 축출된 기묘년(1919)에 실시된 기묘별과에 급제한 후 받은 첫 관직은 정9품의 승문원 권지정자였고,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후 송순은 1526년(중종 21) 홍문관 수찬을 시작으로 49세에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다. 그는 이 가운데 15년을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에게 근무하였다. 이 15년이 송순의 관직 생활의 전성 시기였다. 송순이 모든 관료들이 부러워하는 삼사에 15년여를 근무하였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신비복위소'를 올려 절의를 실천한 스승 박상의 올곧음과 강직함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1527년(중종 22) 홍문관 수찬 시절, 당당하게 대신을 논박하는 '조선왕조실록'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응교 이희건은 즉일로 하향하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연약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남에게 견제되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수찬 허자와 송순 등이 홀로 대간으로서 반론하였다."
이조참판이던 1550년(명종 5), 송순은 이기·진복창에 의해 탄핵을 당한 후 충청도 서천으로 유배된다. 명분은 "부정한 의론을 제기하여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것이었지만, 이기와는 아들과 얽힌 땅 소유 관련 소송 때문이었고, 진복창과는 직접 대사헌을 다툰 관계이자 윤원형이 진복창의 추천을 반대하는 등 사적인 원한이 작동한 결과였다.
송순의 유배는 부당한 것이었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풀려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송순은 선산부사, 전주부윤, 나주목사에 임명된다. 그리고 받은 마지막 관직은 정2품직인 의정부 우참찬이었다. 당시 송순의 나이 77세였다.

#'회방연'의 주인공
회갑연(回甲宴)이 태어난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라면, 회방연(回榜宴)은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다. 태어나서 60년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회갑연은 가정의 경사였다. 그런데 회방연은 과거 합격 후 60주년을 기리는 잔치이니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회방연의 영광을 얻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과거에 급제해야 하고, 급제 후 60년 이상을 살아야 하며, 잔치를 주관하는 출중한 제자가 있어야 한다. 조선 시대 통틀어 4명만이 그 영광을 누렸다고 하니, 회방연은 하늘이 내린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중 한 분이 면앙정로의 주인공인 송순이다.
87세 때인 1579년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열자, 왕(선조)은 꽃(御賜花)과 선원(宣醞, 술)을 내린다. 그리고 잔치가 파할 무렵 정철과 고경명 등 당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竹輿)를 직접 멘다. 당시 가마는 하인들, 노비인 종들이 메던 것이었다. 아마 양반이 멘 가마를 처음 타본 분이 면앙정 송순은 아닐까 싶다.
면앙정에서 베풀어진 회방연에 대해 '담양부지(潭陽府誌'는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송순이 문과 급제한 지 회갑이 되던 날에 면앙정에서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다. 마치 친은일(親恩日) 같아서 호남 온 고을이 흠모하여 구경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이르렀을 때 (승정원 동부승지 겸 춘추관) 수찬 정철이 말하기를,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대나무 가마를 메도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정철은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와 함께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를 메고 내려왔다. 그 뒤를 각 고을 수령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따랐다. 사람들 모두 감탄하며 부러워하였다."
제자가 직접 가마를 메고, 그 뒤를 각 고을 수령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따르면서 감탄하며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1798년, 아주 특별한 과거 시험
조선시대 광주의 역사와 인물을 기록한 '광주읍지'에는 조선 500년간 광주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문과 급제자는 132명, 생원 진사과 합격자는 365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시행된 최종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광주에서도 이런 시험의 예비 시험에 해당하는 초시를 여러 차례 개최한 적이 있다.
그런데 1798년 광주에서 치른 시험은 아주 특별했다. 지방관이 주관하는 시험이라는 점에서는 향시의 일종인 도과(道科)와 비슷했지만, 정조가 직접 '시험문제'를 내렸기 때문이다. 시험장은 광주 객사인 광산관이었다. 시험은 3일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첫날은 시(詩), 둘째날은 부(賦)·전(箋)·의(義)였고, 셋째날은 책(策)이었다. 이 시험에 69명이 응시하였는데, 1등은 임진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인 고정봉과 임흥원이었다.
송순의 회방연은 200년 후 특별히 시행된 과거 시험문제인 시(詩)의 주제가 되면서 또다시 회자된다. '담양부지'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면앙정 위에서 벌어진 잔치는 선생이 60년 전 과거에 급제한 것을 방불케하였으며, 제자들이 직접 가마를 메고 집까지 모시고 갔던 일화는 그 이후에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면앙정 송순의 회방연 일화는 이후에도 대대로 전해 내려와 2백 년 후 정조 임금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시험문제로 출제를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1798(정조 22)년 정조 임금은 향시(지방 과거제도)인 도과(道科)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었다."
'담양부지'에서 볼 수 있듯, 면앙정에서의 회방연 당시 송강 정철 등 제자들이 가마를 직접 메고 집에까지 모시고 갔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이후에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200년이 지난 뒤 정조마저도 그 소식을 듣게 된다. 정조는 호남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 시험을 명하면서 첫날 실시된 시(詩)의 시제를 직접 내렸는데,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었다. 특별 과거 시험의 시제 '하여면앙정'은 2백 년 전인 1579년 송순의 회방연 때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가마에 태워 집에까지 모셔다드린 것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하여(荷輿)는 '수레를 메다'라는 뜻이다.

#면앙정을 찾다
송순의 회방연이 열린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70여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르면 왼쪽에 청송 성수침(1498~1564)이 쓴 면앙정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고, 입구 좌우에는 '면앙정가비'와 '면앙정기'를 새긴 비가 서 있다.
정자 이름 면앙정의 '면앙(俛仰)'은 '맹자(孟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중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는 글에서 비롯된다.
면앙정은 송순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41세 되던 중종 28년(1533)에 건립한 정자다. 송순은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인 면앙정을 자신의 호로 삼는다.
정자 이름 면앙정과 그의 호가 된 면앙정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그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3행시 "숙이면 땅이요(俛有地) 우러르면 하늘이라(仰有天) 그 가운데 정자를 앉혔으니(亭其中) 호연지기 흥취가 이는구나(興浩然)…… "라는 「면앙정가삼언(俛仰亭歌三言)」에 잘 나타나 있다. 시에서 보듯 면앙정은 하늘, 땅, 정자에 사는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 하늘의 위대함과 땅의 자애로움을 아는 사람인 송순이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정자 이름을 면앙정이라고 지은 이유였다.
그럼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 송순은 이곳 면앙정에서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면앙정을 짓고 난 후 그가 지은 시조 속에 그 꿈이 묻어 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어/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그가 꿈꾼 삶은 달과 바람,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소망이었다. 달과 바람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는 신선이 아니었을까? 정철도 송순을 위해 지은 시 '봉증면앙상공화교지운(奉贈俛仰相公和敎之韻)'에서 스승인 송순을 신선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처음 면앙정은 초정(草亭)으로 비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과정을 거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된다.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 방을 배치하였다. 이곳 면앙정에 송순은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 후학을 길러냈다.

뛰어날 뿐 아니라 맞는 바람마저 깨끗하다.
면앙정에는 '면앙정가3언', '면앙정기', '면앙정 30영' 등 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그중 필자의 발을 붙잡았던 편액은 1798년 광주에서 실시된 특별과거시험 당시 내린 정조의 어제(御製)였다. 어제는 호남의 유생들에게 내린 과거시험의 문제, 즉 시(詩)의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과 부(賦)의 '장군수(將軍樹) 등 시험문제가 판각되어 있다. 정조 22년 무오년 광주목사 서형수에게 도과(道科)를 실시하라고 명했다는 내용도 함께다. 원본은 면앙집 5권에 실려 있다.
면앙정에 걸린 편액 중 정조의 어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전라도 유생들에게 2백 년 전 회방연 당시 제자들이 수레를 멘 송순의 일화를 과거 시험 문제로 출제했다는 것은, 송순이 대단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이 수레를 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제자들의 수레를 탄 송순이 부러웠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