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백신 폐기율 4%, 한국 30%”…어쩌다 ‘백신 관리’ 후진국 전락했나

민상식 2026. 3. 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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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료기관의 백신 관리 장부 기록지. 수량, 코드 번호만 적고 백신의 유효기간은 기재돼 있지 않다. [독자 제공]

[헤럴드경제=민상식 기자] #경기도의 한 동네 의원. 정부의 백신 관리 지침이 강화됐으나, 이 의원에는 전산화된 백신 관리 시스템이 없다. 간호조무사 2명이 종이 장부에 손 글씨로 재고를 기록한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낮아 복잡한 재고 관리 프로그램은 사용할 시도조차 못 한다. 종이 장부 기록과 실제 냉장고 속 재고 수량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건소 실사에 대비해 부족한 수량은 도매업체를 통해 나중에 채워 넣는 식으로 개수를 맞춘다. 종이 장부엔 수량만 적을 뿐 백신의 유효기간은 적지 않는다. 보건 사고 발생 시 무엇이 문제인지 과거 데이터조차 살펴보는 게 불가능하다.

#질병관리청과 지방자치단체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백신을 구매해 병의원에 배포한다.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보통 보건소 담당자 1명이 수백 개의 병의원을 관리한다. 실질적인 현장 점검이 불가능해 주로 의료기관의 자율 점검과 사후 보고에 의존한다. 백신 배포 이후 실시간 재고 현황은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어느 병원에 재고가 남고 부족한지 알 수 없다. 특정 병원은 백신이 남아서 폐기하고 다른 곳은 부족한 현상이 매년 반복된다.

매년 백신 폐기로 인해 막대한 혈세가 낭비되면서 백신의 효율적인 관리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해외 여러 국가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겪으면서 체계적인 백신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 사이 우리는 사실상 ‘백신 관리 후진국’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의료 현장에선 백신 공급자와 일선 병의원 간 백신 수급 불균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약품과 백신 전용 재고 및 유효기간 관리 프로그램이 사실상 없는 상황은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백신 관리 체계 부재로, 유효기간이 지난 백신 접종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네 병의원은 물론 대형 병원까지 종이 장부나 엑셀 프로그램 문서 작성을 통해 재고를 관리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프로포폴 등 오남용 우려가 큰 마약류나 보톡스 등 고가의 비급여 의약품도 수기로 관리되다 보니, 누군가 임의로 유출해도 파악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코로나19 백신 10개 중 3개 폐기
한 의료 기관의 백신 보관 냉장고에 백신 관리 종이 장부가 걸려 있다. 병의원에선 매일 2회 온도를 기록하고 5년간 보관해야 한다. [독자 제공]

현재 병의원의 백신 관련 정확한 데이터 파악이 어렵다. 질병관리청 PHIS(지역 보건 의료정보시스템)를 통해 보건소 단계까지만 백신 재고 파악이 가능하다.

의료기관 접종 이후의 실시간 재고는 사후 통계에 의존한다. 의료기관에서 백신 종류와 로트(LOT, 발주량 기본 단위) 번호, 입고 수량 등을 종이에 기록해 관리하기 때문에 보건소에선 백신 재고 점검 시 장부를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이에 어떤 의료기관은 백신이 부족하고 다른 곳은 남아돌아 폐기되는 수급 불균형이 발생한다.

실제로 국내에 도입된 코로나19 백신 폐기율이 약 29%에 달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이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코로나19 백신 활용 및 폐기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2024년 8월까지 총 2억1679만 회분의 백신이 도입됐다. 그중 28.6%에 달하는 6197만 회분이 폐기됐다.

폐기 사유는 ‘유효기간 경과’가 6160만 회분(99.4%)으로 압도적이었다.

백신 콜드체인(Cold Chain·저온 유통) 유지를 위해선 병의원에선 매일 2회 온도를 기록하고 5년간 보관해야 한다. 종이 기록 방식으로는 보건 사고 발생 시 검증이 불가능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백신 재고 관리가 데이터 기반으로 이뤄질 경우 폐기량 감소와 함께 예산 집행 효율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의료 인공지능(AI) 업계 한 관계자는 “백신 폐기율을 낮춰 절감된 예산 수십억 원으로 대상포진 백신 무료 접종 나이를 확대하는 등 공중보건 혜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디지털 플랫폼 도입…백신 폐기율 4%로 낮아져
영국 국민 보건서비스(NHS)의 백신 재고 관리 IMS팀 모습. [NHS 홈페이지 캡처]

해외 여러 국가는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 데이터 기반의 백신 관리 시스템을 의료 현장에 도입했다.

영국은 중앙 시스템을 통해 백신 재고와 유효기간을 관리한다. 영국 국민 보건서비스(NHS)에 따르면 영국은 2021년부터 ‘인벤토리 매니지먼트 시스템(IMS, 재고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백신부터 소모품까지 중앙 통제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IMS 도입 이후 백신 폐기율은 약 4% 수준으로 낮아졌고, 이를 통해 작년 기준 총 680만 파운드(약 140억원)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었다.

영국의 한 병원에선 백신 재고 부족으로 인한 수술 취소 건수가 매달 10건에서 IMS 도입 후 1건으로 줄었다.

또 의료진이 재고 관리에 쏟던 시간이 줄어들어, 연간 평균 약 366시간이 추가 확보돼 의료진이 환자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리콜된 제품이 환자에게 접종되는 경우가 완전히 사라졌다. 과거 며칠씩 걸리던 제품 리콜 처리도 몇 분 만에 완료할 수 있게 됐다.

‘IT 강국’ 인도 역시 모바일 기반의 eVIN(전자 백신 인텔리전스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백신 재고와 냉장 보관 온도를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온도 및 재고 관리의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다.

민간 플랫폼 활용해야…“마우스 클릭 세 번이면” 재고 관리 끝

질병관리청이 주도하는 국가예방접종사업(NIP)의 전국적인 확대에 따라 데이터 기반의 백신 관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NIP는 전국 2만여 개 위탁의료기관과 261개 보건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의료기관은 정부 지침에 따라 백신 재고와 유효기간, 냉장 보관 온도 등을 관리해야 한다.

의료 IT 업계에선 민간 기업의 플랫폼을 활용해 백신 관리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국내 한 의료 IT 기업이 백신 재고관리 플랫폼을 보건소와 의료기관에 무료 제공하는 중이다.

의료 IT 기업 유니백스의 플랫폼 ‘엠디카운트’를 사용하면 백신 유효기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니백스 제공]

의료 IT 기업 유니백스의 플랫폼 ‘엠디카운트’는 백신 입고와 재고, 유효기간 등을 자동으로 정리하고 냉장고 온도 기록을 데이터 형태로 저장한다.

지난달 말 본격적인 서비스 개시 이후 이 시스템을 도입하는 의료기관이 늘고 있다. 설치가 필요 없는 인터넷 웹 접속 방식으로, 클릭 몇 번만으로 재고 관리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컴퓨터 이용에 미숙한 이른바 ‘컴맹’인 의료 실무자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어 호응도가 높다.

유니백스 강영태 대표는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3번의 클릭’ 안에 업무가 끝나도록 설계됐다”면서 “3만원대의 저가형 스캐너로 복잡한 의약품 코드를 읽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최적화했다”고 설명했다.

한 의료기관 관계자는 “보건소 차원에서 표준 프로그램으로 권장할 경우, 병원 현장에서의 백신 데이터 입력이 훨씬 빠르게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보건소 담당자도 현장에 나가지 않고 재고 현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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