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징, 임시정부를 옮기며 우리 독립지사들이 활동했던 땅 [중국 백범 김구로드를 가다]


백범을 지지하는 청년들은 두 개 조직이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과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한인특별반 입교생을 중심으로 1934년 12월에 조직되었다. 군사 조직체 성격을 갖는 일종의 특무 활동 기구였다. 학생훈련소는 안공근의 건의로 설치되었고, 난징성 내 동관두 32호 중국식 단층집 건물 2동이 훈련소 건물로 사용되었다. 모집된 학생들은 이곳에서 중국중앙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입교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받았다. 1935년 5월 말 각지에서 모집된 15명의 한인 청년이 입교했으며, 1935년 10월경에는 인원이 30여 명에 이르렀다.

#교부영 16호, 난징 뤄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의 거주지
교부영 16호 일대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 학생들이 1935년 4월 졸업 후에 거주했던 장소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군사간부의 양성이었다.
중국국민당 정부는 한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국민 혁명군 등 각 방면에 다수의 한인을 수용하는 한편, 이들을 일본군 및 일제 기관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봄, 백범은 난징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중국국민당의 실권자인 장제스와 회담했다. 여기에서 장제스는 백범의 임시정부 재정지원 요청을 혼쾌히 수용했다. 이후 천궈푸(陳果夫)의 협조와 중국국민당의 지원으로 군사 양성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여 1933년 1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만들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인특별반에서 군사훈련을 시킬 수 있는 교관 선발과 함께 교육받을 청년들이 필요했다. 백범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청년들의 군사 훈련을 제의하는 한편,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지청천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그 휘하에 있는 독립군을 입교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백범의 제의를 받은 지청천과 독립군 39명은 1933년 11월 관내에 도착했다. 뤄양분교 내 한인특별반은 지청천을 비롯한 오광선과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군사교육을 맡았다. 한인특별반은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소속 육군군관 훈련반 제17대'로 문을 열었다. 우리 젊은이 92명이 입교하여, 이듬해 4월 9일 62명이 졸업했다.
졸업생 가운데 김원봉과 지청천을 따르던 청년들은 1935년 4월 중순 난징으로 이동하여 교부영 16호에 모여 함께 살았다. 이후 이념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발생하여 약산 따르던 졸업생들은 호가화원으로, 지청천을 따르던 졸업생들은 모가원(毛家苑)으로 옮겨갔다.
한인특별반 학생이 살았던 교부영 16호는 현재 빌라가 들어서 있어서 당시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어림짐작으로 현재 4~16번지 빌라 일대로 추정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