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빛 메타세쿼이아·고즈넉한 고택… 배꽃 필 무렵이 ‘최고의 시간’[박경일기자의 여행]
전남 생산량의 80% 차지하는 배밭
4월 10일 전후 ‘배꽃의 바다’ 펼쳐져
500m 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연두색 새싹 돋아나는 늦봄에 절경
노안면 명물 미나리는 지금이 제철
한해 3500t씩 출하해 전국에 공급
게장백반·홍어·곰탕 등 입맛 자극
고택을 개조한 ‘3917마중’도 핫플

나주·광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전남 나주에 간다. 배꽃 개화도 멀었고, 메타세쿼이아 신록도 아직이다. 영산강 변의 유채꽃도 피려면 보름 넘게 기다려야 한다. 나주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봄이다. 그런데도 서두른 건, 봄날의 나주여행을 일찌감치 다짐받고 싶어서다. 나주는 만춘(晩春)의 봄날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다. 꽉 찬 봄날, 나주에는 하얗게 피어난 배꽃이 구릉을 넘어간다. 보름달 뜬 밤의 배꽃은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로 시작하는 이조년 시조 ‘다정가(多情歌)’의 실사 판이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의 형광색 신록도 봄의 나주에서 만날 수 있다. 나주 노안에서는 향긋한 봄 미나리가 쏟아져 나온다. 배꽃 화사한 봄날, 소매를 붙들고서라도 데려가고 싶은 곳. 서둘러 먼저 가본 나주의 봄 얘기다.
# 나주의 늦봄이 지닌 천금의 값
400여 년 전 나주에는 김선이란 선비가 있었다. 광해군 때 비판과 상소를 마다치 않다가 성균관에서 제적된 이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재야 지식인쯤 되는 인물이었다. 호는 ‘시서(市書)’인데 ‘시서거사(市西居士)’라 불렸던 이유다.
일흔다섯까지 나주에서 쭉 살았던 그는 자그마치 1200여 수의 시(詩)를 남겼다. 소소한 일상부터,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시에 담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400여 년 전 당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유다. 그때 나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주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를 시를 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 나주 여행의 첫머리에 이 시를 꺼내놓는 이유다.
봄이 무르익어서 신록으로 넘어가던 때였던 모양이다. 어느 해 늦봄에 김선이 붓을 들었다. “봄밤 한 시간은 천금의 값이 있다고 / 나에 앞서 동파 옹(소동파)이 절구로 읊었네 / 신록이 정원에 가득하고 꽃은 다 지니 / 둥지 놀란 그윽한 새도 마음을 기울이네.” 봄꽃이 막 지고 연두색 신록이 번져갈 무렵의 정경을 그린 시다.
봄의 정취를 다룬 다른 시가 있다. 만춘 즈음에 만발하는 나주의 배꽃이 떠오르는 시다. “…밤이 긴데 근심은 어찌하여 양미간에 모이는가 / 두견새 울면서 배꽃에 비친 달님을 전송하니 /….” 지금 나주의 배나무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심긴 것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나주에는 토종 배나무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주의 특산으로 배가 등장하고, 금성(나주의 옛 이름) 읍지에도 ‘나주 문평에서 배가 많이 난다’는 대목이 있다. 지금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때도 나주는 봄이면 배꽃으로 환했을 것이다.

# 보름날, 달빛 아래서 보는 배꽃
‘나주’ 하면 바로 ‘배’가 따라붙는다. ‘나주 배’는 그 자체로 고유명사나 진배없다. 생산량도 많지만, 맛은 더 좋다. 나주에 배밭은 300㏊(90만 평)에 달한다. 전국 재배면적의 20%. 전남 지역 배 생산량의 80%가 나주에서 난다.
나주에서도 배 과수원이 밀집한 곳은 금천면 소재지에서 세지면으로 이어지는 23번 국도변이다. 자그마한 배 밭에 핀 배꽃은 꽃구름 같고, 너른 배밭은 ‘배꽃의 바다’를 이룬다. 흐드러진 배꽃에는 만춘의 아찔함이 있다. 배꽃은 벚꽃이 분분히 질 때쯤 만개하는데, 이 무렵이 나주가 건너가는 ‘최고의 시간’이다.
달 밝은 밤에 보면 좋은 꽃이 박꽃과 배꽃이다. 배꽃은 보름달 뜬 밤에 보는 정취가 최고다. 올봄 나주에서 ‘달밤의 배꽃’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빠른 해도, 늦는 해도 있어 크게 빗나가기도 하지만 나주 배꽃의 절정은 대략 4월 10일 전후. 그즈음 보름달 뜨는 날이 4월 2일과 5월 1일이다. 올해는 배꽃 절정과 보름달 뜨는 보름 밤을 맞추기가 어렵다. 꽉 찬 보름달은 아니라도 4월 첫 주말부터 둘째 주 사이에 나주에 가면 교교한 달빛 아래서 배꽃을 볼 수 있겠다.
배꽃 필 무렵 나주에서는, 유채꽃이 같이 핀다. 나주 영산포의 영산교 아래 강변에는 유채꽃이 그득 피어난다. 남도에서 유채꽃은, 이제 흔하디흔하지만 봄날의 안개와 어우러지는 영산강 강변의 유채꽃은 몽환적이다. 배꽃의 정취가 달밤에 좋다면, 영산강의 유채꽃은 물안개가 피는 이른 아침이 최고다. 봄날의 새벽에 영산강은 자욱한 안개를 토해낸다.
# 메타세쿼이아, 초록의 형광빛을 켜다
만춘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나주에 또 있다. 산포면 산제리의 전남산림연구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구원 정문부터 산림치유센터까지 이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자로 그은 듯 이어지는 길 양쪽에 하늘을 찌를 듯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두 줄로 정렬해 있다.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500m 넘는 가로수길은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풍성한 초록으로, 겨울에는 펜화로 그린 듯한 실루엣으로 미감을 드러낸다. 화려하기로는 가지 끝에 연두색 새싹이 트기 시작할 늦은 봄 무렵이 최고다. 새순의 신록이 어찌나 맑고 환한지 봄날의 메타세쿼이아는 가지 끝에 형광색 등불을 켠 듯하다. 새순이 돋는 건 벚꽃 필 무렵. 지금은 새순이 없지만, 한껏 물이 오른 나무에서 봄의 기미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전남산림연구원의 전신은 광주 쌍촌동에 있었던 전남 임업시험장이다. 1922년 광주 임동에서 임업묘포장으로 시작해 1937년 광주 쌍촌동으로 이전했다. 지금 있는 나주로 연구소가 옮겨온 건 1975년이다. 나주로 이사하면서 쌍촌동에서 연구목적으로 키우던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나주로 옮겨다 심은 게 지금의 가로수길이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로 첫손으로 꼽는 곳이 담양. 그곳의 나무가 전남산림연구원이 임업시험장이던 시절에 공급한 나무다. 지금 정문에 심어진 메타세쿼이아가 그때 담양으로 보낸 나무들과 세대가 같다. 연구원 가로수와 담양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형제인 셈이다.
전남산림연구원은 시설 개방이나 관람이 목적이 아닌, 말 그대로 연구원이지만 희귀식물원, 난대림원, 유실수원 등 다양한 정원을 갖춰놓고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공공시설들은 대개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기 마련인데, 방문객을 대하는 직원들의 세심한 배려와 친절이 뜻밖이다. 상업적 대중 관광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 방문객의 편의를 앞세우는 태도와 정중한 안내가 직원들의 몸에 배어있는 듯하다.

# 나주의 봄의 맛, 노안 미나리
이번엔 나주에서 맛보는 ‘봄의 맛’ 얘기다. 영산포 홍어도, 나주곰탕 얘기도 아니다. 향 짙은 미나리다. 나주 노안면 일대에서 짓는 미나리 농사가 보통 큰 게 아니다. 미나리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경북 청도의 ‘한재 미나리’가 연간 출하하는 양이 1800t 남짓. 그런데 나주에서 나는 ‘노안 미나리’ 생산량은, 한재 미나리의 두 배에 육박하는 3500t이다. 노안의 들판에 겨우내 미나리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끝도 없다.
청도 미나리는 알아도, 노안 미나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북 청도의 한재 미나리가 널리 알려진 건 농가들의 수완 덕이다.
청도에서는 재배 농민들이 해마다 수확 철에 작업장 곁에서 삼겹살과 미나리를 파는 식당과 미나리 판매장을 차린다. 식당에서 미나리를 팔고, 직거래도 크게 늘린 비결이다. 한재 미나리 인기는 이렇게 얻어졌다.
그런데 노안의 미나리 재배농가는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오죽하면 장날 나주 오일장 좌판에서도 노안 미나리를 찾아보기 어려울까. 오일장을 뒤졌는데 상인들이 팔고 있는 건 죄다 전주 미나리였다. 미나리가 노안 것인지, 전주 것인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누가 봐도 한눈에 구분할 수 있다. 노안 미나리는 대가 짧은 편이라면 대가 유난히 긴 게 전주 미나리다.
노안 미나리는 향과 맛이 진하다. 햇볕을 잘 받는 곳에서 자라 그렇다는 게 농민들의 설명. 콸콸 솟는 깨끗한 지하수로 재배한다는 것도 재배농가들의 자랑거리다.
# 왜 노안에는 미나리 식당이 없을까
나주 오일장 상인들은 왜 가까운 곳에서 생산한 미나리를 가져다 팔지 않을까. 노안에는 ‘노안미나리협회’가 있는데, 이 협회 김대중 회장의 설명은 간명하다. ‘맛이 좋으니까 값이 비싸서 지역 소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생산만 해놓으면 좋은 값에 앞다퉈 가져가니 사실 농가는 판로에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 노안 미나리는 대부분 서울 가락동 도매시장으로 간다. 김 회장은 “가락동 도매시장 미나리 물량 70%가 노안 미나리”라고 설명했다.
노안 미나리는 벼농사 후작(後作)으로 재배한다. 벼를 베어낸 논에 서둘러 물을 채우고 비닐하우스를 세워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미나리를 길러 출하한다. 수확이 끝나면 미나리밭은 다시 논으로 돌아간다. 1년에 반은 벼를, 나머지 반은 노안 미나리를 재배하는데 미나리 소득이 벼 소득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단다.
노안 미나리가 죄다 서울로 올라가니 나주까지 가도 당최 노안 미나리를 맛볼 곳이 마땅찮다. 재배농가를 탐문해 ‘노안에서 미나리를 사 간다’는 나주의 식당 두 곳을 찾아냈다. ‘노안국밥식당’과 ‘나주볼테기’다. 노안국밥식당은 미리 예약주문을 해야 하는 오리탕에 노안 미나리를 듬뿍 넣고, 나주볼테기는 대구볼테기지리탕과 복지리탕에 노안 미나리를 올린다.
나주볼테기 안주인은 경북 김천 출신인데, 식당은 전남도가 인증한 ‘남도음식명가’다. 탕에 들어간 부드러운 봄 미나리의 향도 좋지만 대구와 복어로 끓인 맑은탕의 시원한 맛으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한 곳이다.
미나리를 맛볼 곳은 찾기 힘들지만, 수확이 한창인 미나리농장을 찾아가서 미나리를 사 갈 수는 있다. ‘나주시 송촌동 13-8.’ 이 주소를 찍고 가면 노안 미나리밭 한가운데 있는 ‘김흥님미나리농장’이다. 농장 옆의 작업장에서 매일 미나리 수확과 세척, 포장작업이 이뤄지니 4월 말까지는 언제든 싱싱한 미나리를 사 갈 수 있다.

# 꽃게장백반, 그리고 보리 홍어
먹을거리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이번에도 홍어나 곰탕 얘긴 아니다. 게다가 나주가 아닌, 광주의 먹거리다.
노안은 나주와 광주 광산구와 맞닿은 경계다. 노안의 미나리밭에서 광주 광산구로 건너가는 데는 차로 딱 3분이다. 나주와 광주의 행정 경계는 저만큼이지만, 노안에서 체감하는 실제 거리는 이웃집만큼 가깝다는 얘기다.
광주 광산 동곡동에는 ‘광주꽃게장백반거리’가 있다. 꽃게장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중앙식당 등 식당 두 곳에서 농번기 점심시간에 팔기 시작한 것이 원조다. 동곡동에 꽃게장백반을 파는 식당은 10여 곳. 꽃게장백반의 원조는 중앙식당 동곡본점이다. 며느리에서 며느리로 이어가며 대를 잇고 있다.
꽃게장백반집의 메뉴는 꽃게장백반 딱 하나밖에 없다. 꽃게장백반에서 방점은 ‘꽃게장’이 아니라 ‘백반’에 찍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식당에 들어서서 인원수만 말하면 간장게장과 꽃게무침, 무조림, 갈치속젓, 굴무침, 파김치 등을 놋그릇에 담아 차곡차곡 차려준다. 1인분 가격은 1만4000원. 펼쳐놓는 반찬의 종류와 숫자를 보다 보면 내는 돈에 비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장은 한 번 무료로 ‘리필’까지 해준다.
누구나 다 아는 대표적인 ‘나주의 맛’은 영산포 홍어와 나주곰탕이다. 영산포 홍어는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지만, 굳이 가장 맛 좋은 제철을 꼽으라면 겨울부터 이듬해 보리 이삭이 팰 무렵까지다. 특히 보리 이삭 팰 무렵의 홍어는 뼈가 연하고 살이 부드러워서 따로 ‘보리홍어’라고 부른다. 늦봄의 나주여행이라면 빼놓을 수 없다. 양지와 사태 등 고기 위주로 넣고 맑게 끓여내는 나주곰탕도 원기를 돋워준다는 면에서 봄에 잘 어울린다.

# 바깥 말고, 내 마음을 보는 자리
나주 읍내에서 가볼 곳 하나 더. 나주향교와 이웃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은 나주의 명소 중 명소다. 나주 원도심에서 폐가로 방치돼 있던 몇 채의 가옥과 정원을 근사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꿔 나주를 찾는 여행자들의 성소(聖所)가 됐다. 손 본 고택 중에는 앞서 소개한 400년 전 나주 선비 김선을 기려 지은 집 ‘시서헌’도 있다. 상호로 쓰인 ‘3917’이란 숫자에는 19‘39’년에 지어진 ‘목서원’이란 고택을 손봐서 20‘17’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개방감 넘치는 커피숍의 분위기도 좋고, 고택의 정취도 근사하다. 전통감성으로 가득한 야외정원도 매력적이다. 경관이나 분위기뿐 아니다. 나주 특산물인 배를 활용한 다양한 디저트 등을 내놓고 있다. 한 해 5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명소가 된 이유다.
요즘 소위 ‘핫’한 관광명소의 공통점은 ‘사진찍기 좋은 곳’이다. 이른바 ‘인스타 감성’이라는 건데, 3917마중의 느낌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 사진 찍기보다 ‘생각하기 좋은 공간’에 가깝다. 3917마중의 미덕은 여행자들에게 여행의 중간에 ‘잠시 멈춰 서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오래되고 누추한 것들을 진심으로 정성껏 다듬어서 만든 매력적인 공간이 여행자에게 그런 시간을 갖게 한다.
여행은 늘 바쁘다. 가야 할 곳도, 보아야 할 곳도 많다. 하지만 때로 멈춰 서서 내 마음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바깥만 보는 여행은 반쪽짜리다. 여기라면 차 한 잔 앞에 두고 정원에 앉아 소도시에 꽉 차있는 평화와 여유에 흠뻑 젖을 수 있다. 그런 날이 만춘의 봄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 도래마을
나주 다도면에는 500년 내력의 전통한옥마을인 도래마을이 있다. 풍산 홍씨 집성촌인 도래마을에는 한옥 고택이 많다. 고택 중 가장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게 풍산 홍씨 도래마을 종가인 홍기응가옥이다. 두 동이 허물어지고 없지만, 한때 여덟 동의 건물로 이뤄진 나주 제일의 부호 저택이었다. 이 집 마당에 키 큰 홍매화 노거수가 한 그루 있어 봄이면 이걸 보러 오는 이들이 적잖았는데, 올해는 아쉽게도 고택 문을 걸어 잠그고 보수공사 중이어서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로 봐야 한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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