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내 퇴직연금, 잠들고 있다…원리금 보장의 함정
401(k)의 성공 비결과 ‘원리금 보장 80%’ 한국의 딜레마

고령화 파고 속에 ‘각자도생’의 노후 준비가 숙명이 됐지만, 우리 국민의 노후 자금은 정작 ‘안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적립금 490조원 시대, 미국은 401(k)를 통해 평범한 직장인을 백만장자로 키워내는데 한국의 퇴직연금은 왜 여전히 원금 보장형 예금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그 결정적 차이를 짚어본다.
미국의 401(k) 제도는 여러 법적·제도적 진화를 거치며 근로자들의 자산 축적과 운용 성과 측면에서 확정기여형(DC) 제도의 세계적 모범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한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2005년 도입 이후 적립금 규모가 459조원(2025년 3분기 말 기준)을 넘어설 만큼 외형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내실 면에서는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적립금의 80% 이상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물가 상승률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실정이며, 빈번한 중도 인출과 이직 시 일시금 수령 관행은 노후 재원의 장기 축적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401(k) 제도의 행동경제학적 진화
401(k)라는 명칭은 1978년 미 내국세법 제401조 k항에서 유래됐다. 이 조항은 본래 근로자가 급여의 일부를 과세 이연 계좌에 적립할 수 있도록 허용한 ‘현금 또는 선택적 적립 약정(CODA)’을 정의한 것이다.
1981년 재무부가 구체적인 시행령을 발표하면서 일반 근로자들이 급여 공제를 통해 자발적으로 연금 자산을 축적하는 길이 열렸고, 미국 연금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했다.
미국의 401(k) 제도가 현재의 완성형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6년 연금보호법(PPA)의 제정이다. PPA는 행동경제학의 ‘넛지’ 이론을 제도에 적극 도입해, 별도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연금에 가입되는 ‘자동 가입’ 제도의 법적 안전장치를 제공했으며, 타겟데이트펀드(TDF)와 같은 중장기 자산 배분상품을 ‘적격 디폴트 투자 상품(QDIA)’으로 지정해 운용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한국, 퇴직연금 도입과 연금화 전환 노력

한국은 2005년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시행되면서 사외 적립 방식의 퇴직연금 제도가 본격 도입됐다. 초기에는 제도의 연착륙을 위해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2012년 법 개정을 통해 신규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함으로써 제도의 보편적 확산을 도모했다.
최근 한국 제도의 중대한 변화는 2022년 4월 근퇴법 개정안의 시행이다. 이 개정안은 상시 300인 이상 사업장의 DB형 퇴직연금에 대해 적립금 운용 위원회 구성 및 적립금 운용 계획서(IPS) 작성을 의무화했고, 퇴직 시 반드시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로 이전하도록 규정해 연금의 누수를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2023년부터는 수익률 제고를 위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본격 시행되면서 미국식 운용 모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투자스타일의 차이가 성과의 격차로
미국 401(k) 가입자들의 투자 성향은 ‘장기 자본 증식‘에 최적화돼 있다. 뱅가드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DC 플랜 가입자 자산의 75%가 주식 관련 자산에 투자되고 있으며 특히 30대 이하는 그 비중이 거의 90%에 가깝게 나타난다. 이는 단기적인 시장 변동성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 과실을 향유하겠다는 철학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결과다.
◇한국, 변화 조짐 보이지만 여전히 원리금 보장 상품에 집중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적립금 490조원을 넘어서며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나, 내실 면에서는 미국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원리금 보장 상품에 대한 압도적인 의존도다. 2024년 말 기준 전체 적립금의 82.6%인 356조원이 현금 및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으며, 실적 배당형 상품의 비중은 17.4%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양국 가입자의 자산 배분 차이는 수익률의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2024년 한국 퇴직연금의 연간 수익률은 4.77%를 기록했는데, 원리금 보장형은 3.67%에 머문 반면 실적 배당형은 9.96%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미국 가입자들의 장기수익률이 연평균 8% 수준에 달하는 것과 비교할 때, 한국 가입자들은 과도한 안전 자산 선호로 복리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효율적인 제도가 성과를 만든다

양국의 수익률 격차를 발생시키는 결정적인 제도적 요인은 ‘디폴트 옵션‘의 설계 방식에 있다. 미국의 QDIA는 가입자의 별도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 고용주가 대신 자산을 운용해주는 적격 투자 상품을 의미하는데, PPA 2006은 TDF와 같이 위험 자산이 포함된 분산 투자 상품만을 QDIA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원리금 보장 상품은 원칙적으로 QDIA에서 제외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23년 디폴트 옵션을 본격 시행하면서 가입자가 디폴트 옵션상품을 직접 지정해야 하는 ‘Opt-in’ 제도를 도입했으며, ‘원리금 보장 상품’을 디폴트 옵션 상품군에 포함시키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원금 손실을 극도로 꺼리는 국내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디폴트 옵션이 디폴트로 적용되지 않을 뿐더러 적립금의 80% 수준이 초저위험(원리금 보장) 상품에 몰리는 현상을 초래했다.
◇미국 401(k) 제도의 성공 비결, ‘매칭 기여금’
미국 401(k) 제도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고용주의 ‘매칭 기여금’이다.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근로자가 적립하는 금액(평균 7.7%)에 대해 일정 비율(평균 4.3%)을 추가로 적립해주고 있다. 이는 가입자에게 즉각적인 60%에 가까운 투자수익률을 체감하게 함으로써, 시장 변동성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지속하게 하는 강력한 심리적 동기를 부여한다.
또 70%에 가까운 DC플랜들이 매년 근로자의 적립률을 매년 자동 상향시키는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사용자의 부담금이 법적으로 연봉의 12분의 1로 고정돼 있으며 부담금 외에 기업의 추가적인 매칭 지원과 같은 문화나 제도가 미비한 현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가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로 작용하며, 퇴직연금을 단지 회사가 주는 ‘급여의 연장’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엄격한 조기 인출 패널티로 은퇴 자산 보전율 ↑

미국 401(k) 제도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퇴직 및 이직 시에도 연금 자산이시스템 내에 머무르는 ‘보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뱅가드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직장을 떠난 가입자 중 70%가 자산을 이전 직장의 플랜에 유지하거나 IRA 또는 새로운 직장의 플랜으로 롤오버했다.
이는 미국의 엄격한 조기 인출 페널티 제도 때문인데, 59.5세 이전에 자산을 인출할 경우 일반 소득세 외에도 10%의 연방 가산세가 추가로 부과된다. 물론 예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 등의 사유가 있을 때 긴급 인출이 가능하지만, 필요 금액에 한해 인출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소득세는 피할 수 없다.
◇한국 근로자에게 퇴직연금은 여전히 ‘목돈 마련’ 수단

한국은 근퇴법 상 중도 인출은 DC/IRP에서만 허용되며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 전세보증금, 6개월 이상 요양, 파산 및 개인회생 등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주거관련 인출이 전체의 64%를 차지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허용되고 있으며, 인출 시 한도 제한이 없어 적립금 전액을 찾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노후 준비의 성패는 제도만큼이나 우리의 ‘관심‘과 ‘인내‘에 달려 있다. 정책적인 변화도 필요하겠지만, 퇴직연금을 ‘예금’이 아닌 ‘투자’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 401(k) 제도의 성공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올바른 운용 철학을 가지고 장기 투자를 이어간다면 우리도 연금으로 든든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정호철 연구위원
정리=도수화 기자 dosh@viva100.com